영화 속 교육

음악으로 세상을 바꾸는 기적

베네주엘라 영화 <기적의 오케스트라 – 엘 시스테마>

글. 이중기

음악이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

베네주엘라의 수도 카라카스는 전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도시로 손꼽힌다. 하루가 멀다 하고 폭력단 사이의 전쟁이 벌어지는 것은 물론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강도ㆍ살인도 빈번하다. 하지만 이 위험천만한 도시에도 학생들은 존재한다. 결코 우호적이지 않는 현실에 좌절할 법도 하지만 베네주엘라 학생들은 내일의 꿈을 키워나가는데 여념이 없다.

이들이 꿈을 키울 수 있었던 데에는 ‘엘 시스테마’가 큰 역할을 했다. 엘 시스테마란 베네주엘라 학생이라면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음악 교육 프로그램이다. 오케스트라를 기본으로 클래식은 물론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무료로 배울 수 있다. 그렇다 보니 베네주엘라 학생이라면 누구나 엘 시스테마를 가입하길 희망한다. 특히 지난 2004년 독일의 ‘구스타프 말러 국제 지휘 콩쿠르’에서 엘 시스테마 출신 구스타보 두다벨이 우승을 차지하면서 엘 시스테마의 인기는 한층 더 올라갔다. 그리고 전 세계 음악인과 교육인들도 베네주엘라를 주목하기 시작했다.

인기가 많다 보니 오해도 적지 않다. 베네주엘라의 모든 학생을 음악인으로 키우는 것이냐는 물음도 잊을만하면 따라온다. 하지만 그럴 일은 없다. 음악으로 ‘길거리의 질서’에서 해방된 아이들은 비로소 자신의 꿈을 키워나가기 시작한다. 음악은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기 때문이다. 엘 시스테마는 음악을 통해 학생들이 자신의 인생과 꿈이 소중하다는 것을 깨닫고 이를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힘을 길러주는데 더할 나위 없이 효과적이다.

엘 시스테마의 운영 원리는 복잡하지 않다. 엘 시스테마에 참여하고 싶은 학생이 있다면 베네주엘라 전국에 설치된 ‘누클레오’로 찾아가면 된다. 가입비는 당연히 없다. 오히려 음악을 배우는 데 필요한 비용은 모두 엘 시스테마에서 제공한다. 예컨대 무료 강의는 물론 공연 관람이나 공연 참가비 그리고 세미나와 같은 부가적인 비용에 대해서도 전액 지원한다. 도난이나 파손 등의 위험 때문에 ‘누클레오’ 안에서만 사용하는 제약조건이 붙기는 하지만 악기 또한 무상으로 주어지는 것도 특징이다.

예술교육은 곧 엘리트 교육이라는 생각이 일반적이던 시절이 있었다. 그리고 이 말은 아직까지도 유효한 말이기도 하다. 엘 시스테마는 엘리트 교육과 가장 정반대에 서있다. 연습 시간이 언제나 방과 후에 시작되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모든 학생들은 학교에서 다른 학생들과 똑같이 공부를 한 후 엘 시스테마에서 음악을 배운다. 이는 엘 시스테마의 교육 철학이기도 하다. 단순히 직업인으로써 음악인을 길러내는 것이 아닌 삶을 살아가는 힘을 길러주는데 방점을 찍었기에 가능한 결과다. 일반적인 공부를 등한시하고 기술연마에만 힘쓰는 흔히 찾아볼 수 있는 예술교육의 모습이나 몇몇 특혜 받은 학생들만의 전유물로 여겨지는 엘리트 교육의 모습은 엘 시스테마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실제로 엘 시스테마에 참가하는 어린이나 청소년의 90% 이상은 청소년 범죄에 노출되기 쉬운 저소득층 가정 출신으로 집계되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설립 취지가 이렇다 보니 엘 시스테마는 교도소로 눈을 돌렸다. 범죄를 저지르고 교도소에 수감 된 재소자들을 연령과 관계없이 단원으로 맞이한 ‘교도소 교향악단’은 지난 2007년부터 운영 중에 있다. 교도소 교향악단은 실제로 상당한 교화 효과를 보고 있다. 이뿐만이 아니라 장애인을 위한 특수 음악 교육도 적극적으로 운영 중이다.

엘 시스테마는 베네주엘라의 가장 어두운 곳에 내리는 빛 줄기와 같다. 그러나 이런 의문도 가질 법하다. 음악이라는 테마가 몇몇 장애를 지닌 이들에게는 차별적으로 다가오지 않을까? 이에 대한 대답으로 엘 시스테마는 농아 청소년을 위한 합창단도 운영하고 있다. 농아인들의 합창단 ‘마노스 블랑카스(하얀 손)’는 그 이름대로 하얀 장갑을 끼고 목소리를 내는 대신 수화로 공연을 펼치며 전 세계적인 주목을 받은 바 있다.

엘 시스테마의 진정한 힘은 시스템에 있다

처음 시작한 1975년부터 영화가 개봉한 2008년까지 베네주엘라에서 엘 시스테마의 도움을 받은 학생은 26만 5천여명. 해마다 엘 시스테마에 참여하는 학생들은 늘어나고 있는 추세다. 이 추세대로라면 오는 2018년에는 100만 명 이상이 엘 시스테마에 참여하게 된다. 이렇게 많은 수의 학생들을 제대로 가르치기란 쉽지 않다. 여러 어려움이 있겠지만 이중 가장 시급한 건 언제나 현실적인 지원이다.

좋은 교육에는 언제나 풍부한 재원과 자원을 필요로 한다. 하지만 누구나 알고 있듯이 풍부한 재원과 자원은 언제나 요원한 일이다. 그렇기에 엘 시스테마의 사례를 우리의 교육 현실과 그대로 접합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다. 엘 시스테마의 어마어마한 운영비의 90%는 국고보조로 이루어진다. 사실상 베네주엘라의 국가 교육 활동인 셈이다.

그렇다고 엘 시스테마의 가치가 비단 베네주엘라에서만 한정된다 생각해서는 곤란하다. 엘 시스테마(El Sistema)는 영어의 ‘System’과 같은 뜻을 지니고 있다. 이름에서 살펴볼 수 있듯 엘 시스테마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것은 풍부한 재원과 자원이 아니라 탄탄한 제도와 시스템이다. 어느 누가 들어와도 효율적으로 작동하고 예상치 못한 재원과 자원 고갈에도 능동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자생력을 갖춘 교육 제도. 엘 시스테마의 진정한 강력함은 바로 시스템에 있는 셈이다.

실제로 엘 시스테마의 사례를 많은 국가에서 벤치마킹 중에 있다. 지금 엘 시스테마와 같은 청소년 교향악단을 운영 중인 국가는 멕시코, 아르헨티나, 우루과이, 브라질, 칠레, 볼리비아, 페루, 콜롬비아, 파라과이, 코스타리카, 엘살바도르, 과테말라, 쿠바, 자메이카, 트리니다드 토바고 등 거의 모든 중남미 국가와 카리브해 국가를 포함한다. 개발도상국만이 엘 시스테마를 벤치마킹하는 것은 아니다. 지난 2009년 미국에서도 동부 지역을 중심으로 ‘엘 시스테마 USA’를 운영 중에 있기 때문이다.

엘 시스테마의 덕목은 지금 우리 교육에서도 주목하고 있다. 서울시교육청은 지난 2월 은평구 서울창의인성교육센터에서 서울학생필하모닉오케스트라 창단식을 열었다. 서울학생필은 관현악과 타악 분야의 250여명이 참가하는 교육 프로젝트로 ‘모두를 위한 오케스트라’라는 주제로 운영하고 있다. 이번 서울학생필 창단에는 엘 시스테마가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베네주엘라의 엘 시스테마와는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 엘 시스테마가 저소득층 학생들이 범죄의 길로 빠져 들지 않게 하는 효과를 목적으로 하는데 반해 서울학생필은 학교교육과정과 연계한 문화예술 중심의 창의감성교육의 외연을 확대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엘 시스테마가 보여주듯 선순환의 힘은 막강하다. 뿌리 내린 선순환은 어떤 외압도 능히 이겨낸다. 실제로 오랫동안 독재정권 치하에 있었던 베네주엘라에서 엘 시스테마는 시스템의 힘으로 오랜 시간 발전을 이뤄왔다. 그러나 조급해할 필요도 없다. 한두 해만에 괄목할만한 성과가 나오기를 바라는 것은 지나친 요행이다.

실제로 엘 시스테마도 1975년 시작된 이래 많은 성과를 거둬왔지만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진 못했다. 오히려 최근 베네주엘라 경제 및 치안 악화로 폭동까지 일어나고 있는 상황까지 치달았다는 것은 주목해볼 만한 일이다. 음악으로 세상을 바꾸는 일은 정말 쉽지 않다. 그러나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엘 시스테마와 서울학생필, 두 오케스트라가 만드는 변화의 바람이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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