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근혁의 현장

휘봉고 학생회 선거전, 대선전에 없는 3가지가 있다

18세가 어리다고? 어른 선거보다도 더 어른스러운 학생회 선거전

글·사진. 윤근혁(서울시교육청 연구교사)

회장으로 뽑힌 정지민 군(가운데)과 부회장단. 31일 오후 전체 유세 모습이다.

저 같은 ‘게릴라 기자’는요. 글도 제가 쓰고 사진도 그냥 제가 찍거든요. 그런데 당혹스럽고도 놀라운 일이 생겼어요.

‘자괴감에 빠진 듯한 당선자들’ 알고 보니...

지난 3월 31일 오후 4시쯤, 서울 동대문구에 있는 휘봉고 학생회 개표장에서 벌어진 일입니다.

“당선자는 기호 1번입니다.”

학생 선거관리위원장이 목소리를 높여 이처럼 외쳤습니다. 개표 결과를 발표한 것이죠. 저는 곧바로 당선이 확정된 기호 1번 후보들 앞에다 카메라를 들이댔습니다. 환호성을 지르는 모습을 찍기 위해 바짝 노리고 든 것이죠.

학생들이라 샴페인은 터트리지 않겠지만, 서로 얼싸 안는 정도는 하리라 기대했습니다. “와 우리가 이겼다”고 고함을 치는 모습도 예상했죠. 하지만 이런 예측은 빗나갔습니다.

투표하는 휘봉고 학생들.

이게 웬일? 당선된 그 찰나에 학생들이 웃지 않는 겁니다.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않았고요. 멀뚱하게 허공만 쳐다보고 있는 겁니다. 서로 단 한마디의 이야기도 하지 않더군요. 마치 ‘이러자고 내가 학생회장에 뽑혔나, 자괴감이 든 사람들’의 얼굴을 하고 앉아 있는 겁니다.

이 친구들이 2주간 아침, 점심, 저녁, 허겁지겁 밥 먹고 잠 줄이며 선거전에 뛰어들었던 학생들이 맞나 하는 의구심이 들 정도였습니다. 왜 이런 뜻밖의 상황이 벌어졌을까요?

반면에 선거에 떨어진 기호 2번 쪽에서는 “이럴 수가 없어”라는 말이 터져 나왔습니다. 눈물을 흘리는 학생도 있었고, 헛웃음을 짓는 학생도 보였습니다.

기호 1번으로 나와 1학년 부회장으로 뽑힌 남학생에게 물어봤습니다.

“당선됐는데도 왜 좋아하지 않는 거죠?”

돌아온 대답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학생회장 후보가 가만히 있으라고 했어요.”

왜 펄떡펄떡 뛰어다녀야 할 후배들한테 가만히 있으라고 했을까? 회장으로 뽑힌 정지민 학생(2학년)에게 ‘주먹 같은 물음’을 날렸습니다.

- 왜 후배들보고 가만히 있으라고 했나요?“우리가 좋아하는 내색을 하면 떨어진 기호 2번 아이들이 마음 아파하잖아요. 그건 같이 선거운동해온 친구들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 기분이 좋긴 한 건가요?“기분은 굉장히 좋죠. 작년부터 준비를 해왔는데 왜 좋지 않겠어요?”

선거전은 승자와 패자가 갈릴 수밖에 없는 전쟁입니다. 그런데 ‘승자로서 지켜야 할 예의’를 생각할 줄 아는 16·17살 학생회장단. 이들의 이름은 다음과 같습니다.

회장 - 정지민
2학년 부회장 - 김지은, 김영조
1학년 부회장 - 박종민, 최서영

오는 5월 9일 치러질 대통령 선거. 이 선거전이 끝난 뒤에도 어른들은 ‘승자로서 지켜야 할 예의’를 생각할 줄 알까요? 이전의 모습에 비춰보면 그럴 가능성이 크지 않습니다.

기호 1번 회장단의 공약 포스터.

인신공격 없이, 돈 한 푼 안 쓰고 선거를 치른다?

어른들의 선거전과 달리, 휘봉고의 선거전은 인신공격도 없었습니다. 오로지 정책으로만 승부를 했죠.

혁신학교인 이 학교는 학생 선관위에서 선거 일정을 정하고 행사를 진행했죠. 방송으로 진행한 한 번씩의 유세와 정책토론회. 그리고 전교생 대상 직접 유세. 이처럼 전교생 대상 3번의 주요 행사가 벌어졌죠.

선거일인 31일 오후 1시 10분. 1~3학년 21개 학급에 있는 프로젝션 TV가 일제히 켜졌습니다. 599명의 전교생 눈앞에 나타난 것은 양쪽 회장후보단의 모습이었죠. 선관위가 방송시설을 이용해 정책토론회를 녹화 중계했습니다.

30여 분간 상영된 토론회에서 양쪽 후보단은 오로지 공약의 실현가능성 등을 놓고 공방을 펼쳤습니다. 학생들끼리 일체의 흑색선전이나 비난이 없는 토론을 펼친 것이죠.

학생 선관위원장은 “상대에게 1분 이내 질문을 하면 30초 간 정리를 하고 1분 이내에 답변을 하라”고 말하더군요. 대선 후보들의 방송토론과 비슷한 방식이죠.

휘봉고의 학생회 선거전이 어른들의 선거전과 다른 또 하나의 모습은 돈이 한 푼도 들지 않았다는 것. 정 회장 당선자는 “선거운동 기간 중에 돈은 전혀 들지 않았다”고 말하더군요.

그래서 ‘설마 한 푼도 안 들었겠느냐. 돈을 쓴 곳 다시 한 번 생각해봐라’고 캐물었죠. 그랬더니 돌아온 대답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사실은 운동원들과 음료수 사먹느라고 1만5000원을 썼습니다.”

이 학교는 양쪽 후보 진영에 물품을 지원했습니다. 돈을 주는 대신 선거용품을 모두 대준 것이지요. 사정이 이렇다보니 돈이 들지 않는 선거가 저절로 진행됐다고 합니다.

이 학교 학생들은 19세 이상에게만 투표권을 주는 이른바 ‘19금 선거법’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요? 이날 전체 유세 현장에서 몇몇 학생들을 만나봤습니다.

제 질문은 ‘어른들만 대통령 선거 하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것이었어요. 약간 화를 돋우는 어감이었죠. 대부분의 나라들은 18세에게도 투표권을 주는데요. 우리나라만 독특하게 ‘19금’을 고집하고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질문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에 대해 박 아무개 학생(고1)은 “고교생을 뺀 채 어른과 어르신만 투표하도록 한 것은 거지같은 선거법”이라면서 “우리도 다 생각이 있는데 왜 참여를 못하게 하느냐”고 직격탄을 날리더군요.

최 아무개 학생(고2)은 “우리도 생각이 있는 국민인데 왜 못하게 하느냐”고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김 아무개 학생(고2)도 “고2, 18살부터는 생각이 다 무르익었다. 투표를 하게 해 달라”고 말했습니다.

휘봉고 선거 행사는 모두 학생 선거관리위원회에서 주관했다.

19금 선거법에 대한 고교생들의 아우성

이날 이 학교 학생들은 체육관에서 전체 유세를 들은 뒤 직접 투표에 참여했습니다. 올해 휘봉고에서는 3개의 기표소를 새로 샀다고 하는데요. 하지만 역부족인 형편. 어떤 학생들은 투표 시작 한 시간을 넘긴 오후 3시 10분쯤까지 줄을 서서 기다렸습니다.

하지만 불만을 터뜨리는 학생들은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한 시간 넘게 소중한 한 표를 던지기 위해 꼿꼿하게 서 있는 학생들. 체육관 건물 밖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적힌 큰 펼침막이 걸려 있었습니다.

“자신의 길을 걷는 사람은 누구나 영웅이다.”

투표에 나선 듬직하고 활기찬 학생들. 이 영웅들에게 ‘한국 민주주의의 운명’이 달려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체육관 외벽에 붙어 있는 큰 펼침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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