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획

진로교육에 바란다

하나의 장면, 하나의 콘텐츠, 하나의 질문

이상우 이사 (협동조합 삶을 디자인하는 진로센터)

“나는 왜 사는가?” 이 질문을 마지막으로 던졌을 때가 언제인지 생각해보자. 그리고 이 질문에 진지하게 고민했던 시간은 얼마나 되었는지도 고민해보자. 사춘기 때 끝냈어야 하는 질문이라고 생각한다면 곤란하다. 어떤 직업, 어떤 진로를 가지는지에 대해 고민하기보다 ‘나는 누구이고 어떻게 그리고 왜 살아가야 하는가?’를 고민하는 것에서부터 진로교육이 시작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2017년의 우리 아이들에게 꿈을 물으면 어떤 대답이 가장 많이 나올까? 평화로운 나라, 가난이 없는 세상, 모든 물품이 100% 친환경인 세상, 세계 평화나 평등한 세상 같은 공동체적 가치를 이야기하는 친구들은 몇이나 될까? 어느 단체가 조사한 결과에 의하면 많은 외국의 아이들은 이와 같은 대답을 한 반면, 우리나라 아이들은 연예인이나 우주비행사 등 특정한 직업을 꼽았다고 한다.1)

언제부터 우리는 미래를 이야기할 때, 직업으로 스스로를 표현하기 시작했을까? 왜 직업으로 자신과 미래를 설명하고자 하는 것일까? 아니, 어쩌다가 우리는 자신의 삶과 미래 시간에 질문을 던지는 존재가 되었을까?

하나의 장면

농업혁명 시대의 하루와 오늘날의 하루는 24시간이라는 물리적 기준 이외에 모든 것이 달라졌다. 이동할 수 있는 거리도, 축적할 수 있는 경험도, 새로 습득한 지식도 그 양적·질적 수준의 차이는 실로 엄청나다. 그러나, 이렇게 축적된 생산력·정보·지식은 인간을 편안하고 행복하게 하기보다는 그것들로부터 인간 자체를 소외시켜서 더 불안하고 불행하게 하고 있다. 인간은 엄청난 속도로 변화 발전해가는 세상의 속도를 놓친 듯, 더 이상 자신의 삶과 미래를 예측하고 조정해낼 수 없게 되어버렸다. 인간은 이미 ‘달리는 호랑이’ 등에 올랐고, 그나마 직업이라도 획득해야 세상과 조응하며 지속성을 담보받는 것이라고 결정난 듯하다. 그러나 이 획득 과정은 당연히 절대시간이 필요하다. 현재 우리가 ‘진로교육’이라 부르고 있는 것은 ‘직업이해’나 ‘직업탐색’처럼 시간을 유예하는 과정이다. 이미 시작한 자유학기제(자유학년제), 오디세이학교 등이 바로 그 장면이 되겠다. 이러한 제도의 가장 큰 의의는 현재 학교의 배움 시스템을 잠시 멈추고 다른 배움을 경험해볼 수 있다는 점에 있다. 본격적인 ‘갭이어’ 제도는 아니나 이런 제도들은 학교 밖의 세상을 주도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는 점에서 더욱 확산되고 다양해져야 한다. 다만 입시 형편에 짓눌려 한 학기, 일 년 정도로 충분한 성과를 낼 수 있는지가 의문스럽다. 다행히 이런 과정으로 ‘진로역량’이 의미 있는 수준으로 ‘개발’되고 있다 하니2) 이 장면은 당분간 우리 교육과정의 이상향으로 시각화될 것이다. 그렇지만, 이것으로 충분한가?

하나의 콘텐츠

필립 코틀러는 그의 저서 <마켓 3.0>에서 제품 중심의 마켓 1.0이나 소비자 지향의 마켓 2.0과는 달리, 이제는 가치가 주도하는 시장이 되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상품 개발 자체 또는 질적 측면뿐만 아니라 미션과 비전을 숭상하는 인간의 영혼에 호소하는 가치 마케팅이 필요하다고 인간을 ‘상품화’하고 있다.

사회가 이러할진대, 어떤 가치를 상정할 때 내 미래가 자유로울 수 있을까? 요새 같은 경우라면 ‘민주주의’라는 개념 하나로도 가정과 학교, 시장과 국가를 설명할 수 있다. 분배와 생산, 인정과 효율, 평화와 안보… 나는 어떤 가치를 내면화해야 하는가?

항구에서 선박의 출입항을 인도해주는 ‘도선사’라는 직업이 직업교육에서 꽤 많이 등장한다. 특이한 직업인 데다가 급여가 높기 때문이다. 그런데 과연 우리나라에 도선사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은 몇 명이나 될까? 그리고 그 직업을 갖기 위해서는 어떤 능력과 경력이 필요할까? 누구나 해낼 수 있는 것일까? 전통적으로 인기 있는 직업이 ‘판검사’다. 그렇지만 누구나 다 판검사가 될 수 없다는 것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축구를 좋아한다고 누구나 박지성이 될 수 없고, 스케이트를 잘 탄다고 해서 누구나 김연아가 될 수 없다는 것 또한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왜 이런 질문을 끌어오는가? 진로를 다분히 개인의 성장으로 보기 때문이다.

확실히 ‘달리는 호랑이’ 세상에서 진로교육이 학교 틀 안에서만 이루어지기는 여러모로 어렵다. 학교 교육이 ‘미래 역량’ 중심으로 교육과정을 개편해가고 있지만, 배움이 이뤄지는 장면에서 주체-객체의 문제 또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학교(시스템, 구조, 공간 등)에 가해지는 다양한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볼 때 대안학교 친구들과 일반 공립학교 친구들이 함께 만나 서로 시너지를 발휘하는 의정부 꿈이룸학교 사례는 또 다른 형태의 성공사례다.3) 자발적이고 집단적으로 동기를 찾고 목표를 설정하는, 마을에서 언니동생들과 함께하는 프로젝트 수업은 가히 미래적이다. 이질적인 경험을 하고 있는 학생들이 만나 스스로 배움을 기획하고, 서로 가르치고 따라 하고 배우는 주체가 되고, 마을 주민들이 지지자가 되는 과정이 바로 진로교육의 제대로 된 콘텐츠가 아닌가?

하나의 질문

이제 우리는 진로교육에서 사용되는 질문부터 바꿔야 한다. 학생들에게 꿈이나 장래 희망을 묻는 것은 우리 삶의 질을 결정하는 가장 낮은 수준의 질문이다. “뭐 하고 살래?”라는 질문은 그저 직업 자체 혹은 그 직업을 둘러싼 환경 정도를 개념화하는 질문일 뿐이다. “어떻게 살래?”라는 질문은 어떤가? 이는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 본인이 갖고 싶은 능력과 기회 그리고 자신만의 비타협적인 신념을 그려내는 질문이다. 또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라는 질문도 있을 것이다. 초등 고학년에서부터 많이 읽기 시작하는 위인전이나 동시대의 사건사고 속에서 모방·배격의 인간형을 그려내는 질문이다. 진로가 광의의 개념으로 개인이 나아갈 인생의 방향이라는 의미로 읽히든, 협의의 개념으로 직업 선택의 관계 설정으로 읽히든, 분명한 것은 사회적 관계 속에서 본인의 존재감을 드러내고 자아정체성을 확인하는 질문인 것은 맞다.

그러나 세상은 호랑이처럼 내달리고 있고 우리는 그 등에서 내려올 수도 없고 안주할 수도 없는 형국이다. 이런 세상이라면 결국 위의 모든 질문은 그 유효기간이 지난 셈이다. 오히려 “왜 사는가?”라는 근본적 질문만이 남게 된다. 이 존재론적 질문은 사춘기 때나 유효한 것이라고 비웃을 것인가? 사춘기가 세상을 받아들이는 자아의 정립기라고 이해한다면, 불안정과 불확정과 불공정한 세상에서, 그리고 신뢰하는 가족이나 친구들 그리고 사회적 관계 속에서 본인을 격려하고 목표를 찾아가는 사명과 비전을 묻는 질문은 이제 그 때와 장소를 불문하고 유효하다.

이처럼 세상에 적응하거나 또는 극복하고자 자신의 삶과 미래에 ‘지속적으로’ 질문을 던지는 것이 필요하다. 중요한 것은 이 질문이 개인적 차원에서 되물어지거나 학교만의 틀 안에서 맴돌아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이 질문은 스스로에게도, 가정에서도, 학교에서도, 마을에서도 그 ‘공동체적’ 기재를 찾아가는 과정으로 ‘진로교육’이 자리매김해야 한다는 것을 묻는 것이다. ‘공동체적 기재’야말로 그 가치를 온전히 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안에서 열정과 신뢰, 협동과 공생의 의미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의미 안에서라면 우리는 이제 ‘달리는 호랑이’에서 내려와도 살아갈 수 있다. “왜 사는가?”라는 질문은 우리가 세상을 만나는 방법을 달리해야 한다는 것을 묻고 있다.

  • 1) 월드비전, “두려움과 꿈 보고서” , 2017, ‘어떤 아이가 거미 무서워할 때, 어떤 아이는 ‘폭격‘이 두렵다’에서 재인용, <한겨레신문>, 2017년 3월 19일
  • 2) 김영식, 유한구, ‘자유학기제 참여 학생과 미참여 학생 간 비교 분석’ , 한국직업능력개발원, 2017
  • 3) ‘한 아이를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 , 한겨레21 제1110호, 2016.0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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