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이야기

세 번째 깨달음

김형진 선생님(한양공업고등학교)

내가 성장한 골목은 무슨 조화로 세상이 그리 쉬웠는지, 3년 사이 S대에 2명, K대와 Y대에 각각 1명씩 진학했다. 어머니께서 우리 형제의 게으름을 질책할 때면, 반드시 골목의 인재들이 빚어낸 미담에 빗대었기에 나는 그들이 못마땅했다. 그런 골목에도 당시 공고에 다니던 형이 있었다. 어른들에게 예의가 바르고 용모도 번듯하여 평이 좋았다. 그런데 어머니께서는 그 형에 대해서는 달리 언급하지 않았다. 대신 그 집 부모를 두고 말씀하셨다. 똑똑한 아이를(대학에 보낼 형편도 못되게 잘못 살아) 공고에 보내놨다고. 우리 어머니에게 공고는 부모 탓에 대학을 포기한 학생들이 가는 애잔한 곳이었고, 그 시절 나도 그런 줄로만 알았다. 내가 특성화고에서 교편을 잡지 않았더라면, 공고에 대한 나의 이해는 여전히 그 정도에 그쳤을지 모른다. 왜냐하면….

내게는 특성화고등학교를 나온 친구가 없기 때문이다. 특성화고등학교에 부임하기 직전 번연히 깨달은 사실이었다. 인문계고등학교와 4년제 종합대학을 거치는 동안, 주변 사람들도 비슷한 경로를 밟아온 사람들로만 채워진 것이다. 이는 내게 삶에 대한 하나의 발견으로 얼마간 파동이 일었다. 어쩌면 여태까지 이토록 얽히는 이 하나 없이 태연히 살아올 수 있었을까? 번민도 일었다. 나는 내가 알지 못하는 선택을 한 학생들에게 과연 무슨 말을 해줄 수 있을까? 아니, 애초에 대학을 가지 않는 학생들을 무슨 수로 공부시키지? 내가 아는 ‘학교’는 너무나 작았고 삶의 경험은 더욱 빈한했다. 이 두 번째 깨달음이 보다 시렸다.

“올해의 저는 여러분에게 부모님 다음으로 중요한 어른입니다.” 담임으로서, 열일곱의 나이에 이제 막 자신의 전공을 갖게 된 아이들 앞에서, 잔뜩 무게를 잡는다. 마치 날 때부터 담임이었고 만 명의 졸업생을 배출시킨 사람처럼. 공고가 낯설기는 아이들이 더할 것이니 담임이 학교에 대한 자신감을 보이지 않으면 생활이 될 리가 없다. 그리고 이제는….

우리 학생들이 인문계고등학교 학생들보다 훨씬 빨리 철이 들며 단단하다는 것을 안다. 7년째 OECD 회원국 중 대학진학률이 1위이며, 한때 80%에 육박하는 학생들이 대학에 갔던 나라에서 이 아이들은 취업을 먼저 하겠다는 선택을 하였다. 어찌되었건 대학에 간다는 것은 진로에 대한 결정을 이십대 중반 이후로 유예한다는 것이다. 그 사이 세상을 바라보는 꾀도 키운다. 몇 차례 좋은 기회를 얻을 것이고, 그것이 여의치 않다면 다시 배움을 더하며 유예를 연장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 학생들은 대개 열여덟이 되기 전에 진로에 대한 결정을 일단락 짓는다. 사실상 2년 사이에 선택한 진로에 따른 자격을 습득해내는 아이들이기에 분주하다. 나는 인문계고의 밤을 지킬 때보다 작업복을 입은 학생들이 도장을 하고 나무톱밥과 쇳가루를 날리는 공고의 밤을 지새우며 가슴이 더 뜨거워짐을 느낀다. 그것은….

만약 경기가 좋았다면, 이 학생들 중에서도 상당수가 똑같이 대학 진학을 준비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일찍이 공고에 대한 어머니의 진단은 아주 제한적인 부분에서는 옳았다. 더 배우기보다 더 일하기를 택한 학생들에게는 역시 얼마간의 사연이 더 있지 않겠는가. 보다 일찍 어른이 되어주는 아이들이다. 소홀할 도리가 없다.

또 손등 때문이다. 어느 출근길, 구레나룻이 턱까지 닿은 학생과 함께 버스에 올랐는데, 손잡이를 잡은 그 손등이 비현실적으로 여려 보여 여러 날 눈에 밟혔다. 아직 공구를 쥐기에는 너무 일러 보였던 그 손등.

“올해의 저는 여러분에게 부모님 다음으로 중요한 어른입니다”라는 말이 빈말이 되지 않게끔, 설혹 이 아이들의 배움이 이 교실에서 그칠지라도 그것만으로도 사람답게 살아가는 데 부족함이 없게끔, 이제는 내가 해야 할 일과 싸워나갈 바를, 아니 나 또한 학생들로부터 세 번째 깨달음을 얻은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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