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태성의 교육저널 그날

32년 나이 차…스승과 제자의 열린 소통

제자와 함께 성장한 대학자 퇴계 이황

퇴계 이황은 제자들에게 어떤 스승이었을까? 성리학자 이미지처럼 고집스러운 스승을 생각하기 쉽지만, 실제 이황은 나이와 직급을 막론하고 제자에게 예를 다하는 ‘쿨’한 스승이었다. 사단칠정에 관한 토론을 무려 8년이나 이어갈 수 있었던 이황과 기대승의 관계 속에서 존중을 바탕으로 교학상장(敎學相長)하는 참스승의 모습을 살펴보자.

글. 최태성 선생님(별★별 한국사 연구소장, 전 대광고등학교 교사) / 그림. 이철민

5월 15일이 스승의 날인 것은 모두 알고 계실 겁니다. 그런데 스승의 날이 왜 5월 15일일까요? 5월 15일은 바로 세종대왕의 탄신일입니다. 민족의 스승이라고 할 수 있는 세종대왕의 탄신일을 스승의 날로 삼은 것이죠.

‘스승’은 가르쳐 올바르게 이끌어주는 사람을 뜻합니다. 여러분도 인생에서 어려움을 만났을 때 생각나는 ‘스승’이 있으신가요? 존경하는 선생님께서 해주시던 따뜻한 격려의 말을 생각하면 다시금 인생을 살아갈 힘과 용기가 솟아나기도 하는데요. 오늘은 인생의 스승으로 삼을 만한 역사 속 인물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바로 조선시대 최고의 성리학자, 천 원 지폐의 주인공 퇴계 이황입니다.

이황은 34세에 대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라 성균관 대사성까지 순탄한 관직생활을 이어갑니다. 하지만 정계가 어지러워지자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돌아와 학문 연구와 후학 양성에 힘쓰죠. 이후 조정의 끊임없는 부름을 받지만 거절하거나 거절이 어려울 때는 잠시 관직에 나아갔다가 물러나기를 반복합니다. 왜 관직에 나아가지 않느냐는 제자의 물음에 이황은 “자신이 몸을 바쳐야 할 곳에서 의로움이 실현될 수 없게 되었다면 당장 물러나야 그것에 위배됨이 없다.”라고 답했다고 하죠. 이처럼 이황은 140번이 넘는 관직 임명 중 무려 79번을 고사합니다. 관직에서 물러날 당시에는 곡식 두어 말 정도밖에 없을 정도로 청빈한 삶을 살았다고 합니다. 그의 사상과 학문을 따르는 제자들로 퇴계 학파가 형성되었고요. 동인의 사상적 기반이 되었죠. 이러한 퇴계 이황은 동방의 주자라고 불리며 성리학의 토착화에 큰 획을 그은 대학자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황은 어떤 스승이었을까요? 지금 천 원 지폐를 꺼내 이황의 얼굴을 한번 보세요. 우리가 생각하는 성리학자의 이미지처럼 엄격하고 깐깐하게 제자들을 대하는 그런 꼬장꼬장한 모습이 보이진 않나요? 하지만 퇴계 이황은 요즘의 말로 정말 ‘쿨’하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열린 사고를 가진 선비였습니다. 퇴계 이황의 이러한 모습을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고봉 기대승과의 논쟁이죠. 이황과 기대승은 13년간 약 100통의 편지를 주고받으며 학문적 논쟁을 이어갔는데요. 특히 약 8년 동안 두 사람이 펼친 사단칠정(四端七情)에 관한 논쟁은 유명하죠.

이황과 기대승의 첫 만남은 기대승이 과거를 치르기 위해 한양에 올라왔을 때 이루어지는데요. 당시 패기 넘치는 신출내기 유학자는 이황을 찾아가 이황의 성리학 이론에 대해 자신의 견해를 밝히죠. 이에 대해 이황이 기대승에게 편지로 답하면서 사단칠정에 대한 이들의 뜨거운 논쟁이 시작됩니다.

두 사람의 뜨거운 논쟁의 핵심은 이렇습니다. 사단은 인간 도덕심의 기본을 뜻하는 측은지심(남을 불쌍히 여기는 타고난 착한 마음), 수오지심(자신의 옳지 못함을 부끄러워하고 남의 옳지 못함을 미워하는 마음), 사양지심(겸손하여 남에게 양보하는 마음), 시비지심(잘잘못을 분별하여 가리는 마음)을, 칠정은 희(기쁨)·노(노여움)·애(슬픔)·구(두려움)·애(사랑)·오(미움)·욕(욕망) 등 인간의 감정을 통틀어 일컬은 것이에요. 이황은 사단은 이(理)를 통해 발현되고 칠정은 기(氣)를 통해 발현되며 이와 기는 별도로 작용한다는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을 주장했어요. 그런데 기대승은 이를 반박하며 이와 기가 함께 발현된다고 주장했죠. 여기서는 이 이론의 전개를 다루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논쟁을 다루었던 이황과 기대승의 모습을 주목하고자 합니다. 당시 기대승은 26세였고 이황은 58세였습니다. 아버지와 아들뻘이었어요. 나이뿐만 아니라 벼슬에 있어서도 큰 차이가 있었습니다. 기대승은 갓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을 단 종9품. 지금으로 치면 9급 말단 공무원이었고, 이황은 당시 3품인 성균관 대사성을 마치고 공조참판 자리에 오릅니다. 성균관 대사성은 지금으로 치면 국립대학 총장급이고 공조참판은 장관급이었습니다.

이러한 나이와 직급의 까마득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이황은 기대승을 학자로서 존중하고 항상 공손한 태도로 대했습니다. 이들의 토론은 기대승이 의문을 제기하면 이황이 이에 답하는 식으로 진행되었는데요. 토론의 내용은 그 어떤 것보다 뜨거웠지만, 항상 서로에게 예를 다하고 공경하는 자세로 대했기에 무려 8년이라는 시간 동안 이어질 수 있었던 것이죠.

대학자 이황이지만 젊은 제자의 학식을 존중하며 8년간이나 토론을 이어갔다는 것은 이황이 얼마나 훌륭한 인품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보여줍니다. 심지어 이황은 논쟁 중에 기대승의 논리를 일부 인정하고 그것을 받아들여 자신의 생각을 고치기도 하였습니다. 이 둘의 논쟁은 서로의 학문의 깊이를 더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조선 성리학 발전에 커다란 역할을 하였죠.

이황은 기대승뿐만 아니라 제자들을 항상 예로서 대하고 공경했다고 합니다. 아무리 지체가 낮고 어린 제자라도 소홀히 대접하지 않았으며 친구를 대하듯 예를 갖추어 대하고 너라고 부르는 일도 없었다고 합니다.

선생님은 학생의 성장에 엄청난 영향력을 미칩니다. 때론 선생님의 말 한마디에 한 사람의 인생이 바뀌기도 하죠. 제자의 학문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이황의 이러한 자세는 기대승이라는 또 한 명의 유학의 거두를 만들어냈습니다. 그러나 스승 역시 제자와의 관계를 통해 성장합니다. 열린 사고와 겸허한 자세로 제자와 함께 성장해나간 이황. 5월 스승의 날을 맞아 진정한 사표(師表)가 되고 있습니다.

최태성

성균관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대광고등학교 교사로 근무 중이던 2001년부터 EBS 한국사 강사로 활동했다. 누적 수강생이 500만 명이 넘는 유명 강사로 <무한도전>, <역사저널 그날> 등에 출연했다. 현재는 <역사기행 그곳> 에 출연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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