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 속 서울교육

몽매함이란 새로운 미래의 가능성

<주역(周易)>의 몽괘(蒙卦)

고전 속에 ‘혁신교육’이 있다? 믿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과장이 아니다. 오늘의 우리만 교육의 혁신을 고민하고 있는 게 아니라, 동서고금 모든 세대의 사람들이 다 나름 교육의 혁신을 고민해왔다. 옛사람들에게도 교육은 공동체의 유지와 성숙을 위해 매우 중차대한 일이었다. 그래서 고전에서 혁신교육의 아이디어를 찾아보는 일이 아주 허무맹랑한 일은 아닐 것이다.

이상수(서울시교육청 대변인, 철학 연구자) 그림. 이철민

덜 가르치고 더 기다려주기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고전 가운데 속하는 <주역(周易)>을 보면, 교육에 대한 심상하지 않은 고민이 담긴 대목이 남아 있다. 지금부터 3000년 전에 세상에 나온 <주역>은 잘 알려진 것처럼 점을 치기 위해 편찬한 책이다. 점을 치는 사람들은 인생의 모든 문제를 다 점에 물어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주역>에는 인생에서 만날 수 있는 모든 경우의 수가 다 들어 있다. <주역>은 64괘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 64가지의 괘는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어느 굽이에선가 부닥칠 수 있는 서로 다른 64가지의 상황을 보여준다. 이 가운데 몽괘(蒙卦)라는 괘가 하나 있다. 우리말로 옮기자면 ‘몽매함에 관한 점괘’라는 뜻이다. 몽매함을 어떻게 깨칠 것인가 하는 것이 이 괘의 주제이다. 다시 말해 이 괘의 주제는 바로 ‘교육’이다.

<주역>의 모든 괘는 전반적인 상황을 보여주는 ‘괘사’와 그 상황 안에서의 여러 가능성을 보여주는 ‘효사’로 구성된다. 몽괘에서 전반적인 상황을 보여주는 ‘괘사’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 괘사에는 교육의 기본 원리에 대한 고민이 담겨 있다. 우선 선생이 찾아가서 가르치는 게 아니라 학생이 찾아와서 가르쳐줄 것을 청해야 한다는 것이다. 교육의 가장 큰 난점은 자발성에 있다. 배우는 사람이 스스로 깨우치겠다는 자발성이 없으면 교육은 훈육이나 사육과 구별되지 않는다. 그래서 몽매한 어린이가 배워야겠다는 자각이 들 때까지 잠시 내버려둘 필요도 있다. 처음에 물어보았을 때는 말해주지만, 두 번 세 번 물으면 더 말해주지 않는다는 이야기 또한 몽매한 어린이가 자발적으로 생각하도록 시간을 준다는 뜻이다. 이 또한 자발성을 강조한 말이다.

이 구절을 읽으면서 오늘 한국의 교육 현실을 떠올리는 이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우리 사회에는, 아이가 무엇을 하고 싶어 하는지, 무엇을 궁금해하는지, 아이가 소화해낼 수는 있는지 등에 관해서는 전혀 고민하지 않고, 오로지 부모나 어른의 관점에서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지식을 머릿속에 욱여넣는 것을 교육이라고 착각하는 이들이 너무도 많다. 이런 착각 때문에 아이들은 처음 접하는 세상에 대해 마땅히 품어야 할 자발적 호기심의 소중한 순간을 박탈당한 채, 학습과 교육은 지겹고 끔찍한 것이라는 선입견만 품게 된다. 두 번 세 번 되풀이해서 주입하는 것이 지식 습득에 좋은 교육법이라고 여기는 이들 또한 아이들의 자발성을 짓밟으면서 그게 교육이라고 착각하는 이들이다. 아이들의 마음속에 자발적인 호기심과 동기가 샘처럼 고일 때까지 참아주는 것, 그것이 오늘 한국 사회에 가장 절실한 교육 방법론이다. 역설적이게도, 덜 가르치고 더 기다려주는 것이 아이의 자발적 성숙을 도와주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어린이의 몽매함은 새로운 미래의 가능성

몽괘의 상황에서 여러 가능성을 보여주는 ‘효사’는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되어 있다.(점에 관한 내용은 설명을 생략한다.)

알쏭달쏭하고 압축적인 점술의 언어이지만, 여기에는 3000년 전 고대 중국인들의 교육에 대한 깊은 고민이 충분히 반영되어 있다.(어린이와 부녀자가 몽매하다는 식의 가부장적 낡은 시각이 있음은 비판적으로 읽어야 하겠다.) 여기서 “어린이의 몽매함이 길하다(童蒙, 吉)”는 관점이 핵심이다. 어른의 관점에서만 본다면 어린이의 몽매함은 훈육해야 할 대상일 수 있지만, 어린이는 지금 세대와는 다르게 자라날 것이므로 그 몽매함이란 새로운 미래의 가능성이다. 그래서 길한 것이다.

여기에는 몽매함에서 벗어나는 길이 세 가지 나온다. 먼저 형벌을 가해서 몽매함으로부터 벗어나오도록 하는 방법(刑人)이다. 이런 강압적인 방법을 써야 할 경우도 있겠지만, 이런 방법은 질곡을 벗어나도록 하기 위해서만 써야 하며(用說桎梏), 계속 강압적인 방법만 사용하는 것은 좋지 않다(以往吝). 두 번째 방법은 몽매함을 치는 것(擊蒙)이다. 몽매함을 쳐서 깨우치는 것인데, 이때 공격자가 되는 게 아니라(不利爲寇) 방어자가 되는 게(利禦寇) 중요하다. 이는 너의 몽매함을 깨우쳐주겠다는 태도가 아니라, 네가 몽매함으로 인해 당할 수 있는 문제를 함께 방어해 함께 극복해가자는 태도를 취하는 것이다. 여기서도 몽매한 어린이를 중심에 두고 고민하는 태도를 읽을 수 있다. 마지막으로는 몽매함을 포용하는 태도이다. 어린이는 세상에 대한 지식이 없는 것과 동시에 선입견과 편견도 없다. 이 흰 바탕의 몽매함을 가지고 어린이는 세상을 알아가고 관점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어린이의 이 몽매함을 어른의 시각에서 재단하는 게 아니라 껴안고 포용하는 태도(包蒙吉)를 가져야 한다.

<주역>은 전통사회에서 어린이처럼 몽매한 존재 취급을 당하던 부녀자의 의견도 껴안으면 길하다(納婦吉)고 말한다. 그러면 어린이가 집안을 일으켜 세울 것(子克家)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매우 혁신적인 교육관이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만 필요한 관점이 아니라, 먼 미래에도 유효한 관점일 것이다.

율곡 이이는 40대 때 어린이들을 위한 교육 자료로 <격몽요결(擊蒙要訣)>이라는 책을 썼다. 이 책은 이후 조선시대에 처음 학문에 들어서는 이들의 입문서로 크게 각광을 받았다. 여기서 ‘격몽’이란 우리가 인용한 <주역> 몽괘에서 따온 것이며, ‘몽매함을 친다’는 뜻이다. 나는 이 책의 제목이 아쉽다. 이이가 ‘격몽요결’ 대신 ‘포몽요결’(몽매함을 포용하는 가르침의 요점)을 썼더라면 조선시대의 교육이 훨씬 더 개방적이고 혁신적으로 변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세상의 때가 묻지 않은 어린이는 본디 몽매한 것이 당연하다. 그 몽매함에서 새로운 창조와 미래의 역량이 나온다. 안데르센의 동화 <벌거벗은 임금님>은 어른의 눈으로는 간파하지 못하는 사태를 어린이가 간파해낼 수 있음을 우의적으로 보여준다. 어른의 눈으로 아이들을 재단하여 본디 내재해 있는 창조성과 미래의 역량을 망치지 않는 게 가장 중요하다. 교육의 혁신은 어린이를 훈육의 대상이 아니라 스스로 발아하는 씨앗과 같은 존재로 보는 데서 비로소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상수

한겨레신문에서 17년 동안 기자로 일했으며, 2014년부터는 서울시교육청 대변인으로 일하고 있다. 연세대에서 제자백가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저서로 <운명 앞에서 주역을 읽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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