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획

문명의 전환기, 진로직업교육의 속도와 방향

메뉴선택형 진로교육이 아닌 미래핵심역량 중심 교육으로

시대가 바뀌어 인공지능과 로봇을 이야기하는 때가 됐지만, 우리 사회는 아직도 과거 전통적인 산업화시대의 진로관에 빠져 있다. 지금과 같은 ‘문명의 전환기’에는 급하지 않은 마음으로 멀리 내다봐야 한다. 이제는 메뉴판식 직업체험이 아닌, 핵심역량 중심 교육이 이루어져야 한다.

글. 이충한 (하자센터 기획부장)

당신이 알고 있는 진로는 더 이상 진로가 아니다

“넌 도대체 커서 뭐가 되려고 그러니?” 어린 시절 누구나 들어본 말이다. 희망직업조사라는 좀 더 고상한 방법도 있지만 본질은 같다. 현존하는 직업을 메뉴판처럼 나열해놓고, 그중 하나를 골라서 열심히 노력하라는, 그리고 메뉴를 잘 고르지 못하면 먹고살기 힘들다는 뜻이다. 이게 한국사회에서의 ‘진로’다. 하지만 이것은 전통적인 산업화시대의 진로관이다. 이 시기에 국가는 특정 직군의 노동자를 수만 명부터 수십만 명까지 만들어내곤 했다. 특정 산업에 종사하는 사람들로 도시 하나를 꾸릴 수도 있었다. 권위주의적 국가 체제에서 학교는 노동자를 생산하는 공장과 같았다. 그 안의 학생들이 어떻게 느꼈든, 노동력 생산 기관으로서 한국의 학교는 오랫동안 꽤 잘 작동했다고 평가되었다.

문제는 큰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현재에도 이런 산업화시대의 진로관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다. 이런 ‘메뉴선택형 진로’는 많은 청소년의 미래를 망칠 수도 있다. 그 직업이 10년 뒤에도 존재할 것이라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개인의 노력과 실력으로 극복할 수 없는 ‘일자리 소멸 시대’가 도래하고 있다면, 학교도 변화해야 하지 않을까?

문명의 전환기

한국사회에서 ‘4차 산업혁명’이라는 단어는 많은 논쟁을 낳고 있다. 한편에서는 엄밀한 학문적 개념이 아니며, 일자리소멸을 가속화시켜서 노동자들의 협상력을 떨어뜨리려는 음모일 뿐이라고 말한다. 다른 한편에서는 인공지능과 로봇이 인간을 노동으로부터 해방시킬 것이라거나, 좋든 싫든 적극적으로 대응해야 할 중요한 거대한 전환이 시작됐다고 얘기한다. 사실 모두 맞는 말이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는 이미 3차 산업혁명 때부터 예견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한국사회는 ‘저성장’을 탈출하기 힘든 상황에 빠져 있다. 어떤 나라보다도 한국에서 4차 산업혁명으로 인한 위기감이 큰 이유는, 이처럼 우리의 ‘현재’가 불안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학생, 학부모, 교사의 극심한 진로불안이 생긴다.

그렇다면 모든 것이 빠르게 변화하는 이런 ‘문명의 전환기’에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급하지 않은 마음으로 멀리 보아야 한다. 그런데 어른들의 마음이 불안하니 이게 쉽지 않다. 교사든 부모든 큰 그림을 제시해주려고 노력하기보다 일단 이것저것 많이 탐색하고 체험해보기를 원한다. 하지만 체험 과잉은 진로불안을 가장 크게 겪는 청소년들에게 오히려 독이 된다. 이들은 본능적으로 어떤 길도 유효하지 않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집중할 수가 없고 동기도 생기지 않는다. 진로직업교육 자체가 부정적 학습효과를 낳게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직업교육에서 미래핵심역량 강화로

사실 답은 명확하다. 산업화시대의 메뉴선택형 진로교육을 넘어, 어떤 직업에도 적응할 수 있는 미래핵심역량 중심 교육으로 변해야 한다. 인간이 아닌 기계와 경쟁해야 하는 시대에는 가장 인간적인 방식으로 일해야만 ‘경쟁력’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미래핵심역량을 강화할 수 있을까?

가장 중요한 것은 경계를 넘는 경험이다. 디지털과 아날로그, 가상과 실제마저 통합되는 초연결사회에서 구획된 교과과정 밖에서 경험하고 사고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학교 밖이면 더 좋다. 그런데 우리의 실정은 어떤가. 학교가 학생들의 모든 시간과 공간, 체험을 통제하고, 다양한 활동도 생활기록부에 올릴 수 있느냐 없느냐로 구분하고 있다. 미래핵심역량을 개발하는 것이 진로교육의 목표라면 사실상 학교 안과 밖, 일반고와 특성화고, 입시와 취업 등의 구분이 크게 중요하지 않다. 나누고 가두는 건 청소년들의 미래 개척을 위해서가 아니라 학교의 현재를 지키기 위해서다. 당연히 실패할 수밖에 없다.

하자센터에서는 지난 10년 동안 창의캠프, 커리어위크 등의 진로직업캠프를 통해 특성화고 청소년들을 만나왔다. 여기서 만났던 특성화고 학생들의 가장 큰 장점은 자발적이고 유연하다는 점이었다. 비결을 물어보니 프로젝트 수업, 동아리 등을 통해 ‘협업’을 경험할 기회가 많고, 서로를 미래의 동료로 느끼기 때문이라 대답했다. 한 마디로 시간과 관계에 있어 ‘틈새’가 있다는 것이었다. ‘이 친구들이 미래 사회의 인재가 되겠구나’ 싶었다. 그런데 올해 커리어위크에서 만난 한 특성화고 선생님은 조금 어두운 전망을 내놓았다. ‘조기 진로 선택과 노동시장 진입’에 대한 정책 단위의 요구가 커지면서 이들에게 주어졌던 상대적 자율성, 즉 틈새가 훼손될 것이라는 이야기였다.

진로 전환을 위한 시간의 ‘틈새’

이처럼 우리 사회는 특성화고의 청소년들에게 빨리 직업을 선택해서 일터로 나가기를 요구한다. 물론 일찍 직업을 선택하는 것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두 번째 기회’가 없는 것이 나쁠 뿐이다. 빨리 직업을 갖게 도와주면 그들의 진로가 빨리 해결되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섣부르게 취업했다가 후회와 상처로 훨씬 멀리 길을 돌아가게 되는 청소년들이 부지기수다. 청소년들은 다양한 청년과 기성세대를 만나서 자신의 고유한 역량과 캐릭터, 장단점을 사회적 참조집단 속에서 포지셔닝하고, 구체적인 경험 데이터를 통해 미래를 상상해볼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주변을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의 틈새’ 없이 건강한 진로 발달은 이루어질 수 없다.

진로는 100m 달리기가 아니라 로드무비

진로가 100m 달리기와 같은 것이라면, 이제 더 이상 아무도 행복해질 수 없다. 열심히 뛰어갔는데 지각변동이 일어나서 결승점이 옮겨지거나 없어지곤 하는, 문명의 전환기에 우리가 서 있기 때문이다. 이런 시기에는 빠르게 뛰는 것보다 커브를 잘 도는 능력이 중요하다. 언제 속도를 낮추고 옆을 살펴야 할지 아는 감각이 중요하다. 이런 의미에서, 미래진로역량의 핵심은 ‘전환력’이라 할 수 있다.

전환력은 자신과 사회에 대한 신뢰가 있어야만 얻어질 수 있다. 청소년들이 겪는 동기화의 위기는 그들 안이 아니라 밖에서 자라난다. 길이 막힌 것 같아도 스스로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다는, 저 너머에는 보다 좋은 것이 펼쳐져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없으니 주저앉게 되는 것이다. 기성세대의 과제는 이들의 등을 떠미는 것이 아니라, 잠시 멈춰 옆을 보아도 괜찮다는 신뢰를 주는 일이다.

진로는 로드무비다. 결말에 무엇을 얻거나 이기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닌, 함께 가는 것 자체가 의미이고 행복인 것이다. 사회는 청소년들이 다음 단계로 이행하는 것 자체, 그 과정에서 경험하는 모든 것이 성장에 도움이 된다는 메시지를 발신하면서 장애물을 함께 제거해주기만 하면 된다. 그것이 개인의 진로 불안을 없애기 위해 기성세대가 힘써야 할 ‘사회 자체의 진로 활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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