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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적 행동으로 좋은 세상 만들기

피터 싱어, <효율적 이타주의자>

한 명의 창의적 인재가 10만 명을 먹여 살린다고 한다. 과연 그럴까? 현재 진행되는 역사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고 알려준다. 한 명의 인재가 만든 기술이, 기계가, 알파고가 10만 명의 실업자를 만들 것이다. 창의적 인재는 결국 세습사회 금수저를 위한 소모품일 수도 있다. 근대에 기계파괴운동이 있었다. 문제는 기계가 아니라 인간이다. 너와 나의 사회관계다. 자본과 노동의 역할이다. 맹목적 성장을 성찰해야 한다. 도덕적 성장과 인간적 가치를 실현해야 한다. 노동은 생산요소가 아니다.

글. 오지연 주무관(서울시교육청 대변인실)

함께할 때 공동체는 지속가능해진다

1983년 3월 8일 플로리다주 올랜도에서 레이건 미국 대통령은 연설을 통해서 소련을 ‘악의 제국’이라고 불렀다. 이 단어 때문에 이 연설은 역사적인 연설이 되었다. 악이 아니라고 반박할수록 소련은 체제 모순에 빠지게 되었다. 전략적 도덕 프레임의 위력이었다. 권력 집중과 남용, 상대적 비효율로 인한 정체 때문에 공산주의는 실패하고 자본주의는 승리했다. 신자유주의 시대가 도래했다.

승리에는 절제의 미덕이 필요하다. 견제 없는 자본주의는 자본의 자유를 극대화하고자 했다. 평등지상주의 권력의 압제는 거의 전멸했지만 자유지상주의 시장에서 기업의 이윤 추구는 거칠 것 없이 폭주했다. 인간 존엄을 강조하는 민주주의는 약화되었다. 자본이 국경을 자유롭게 넘나들게 된 변화 즉, 세계화는 제동장치 없이 질주하여 지금에 이르렀다. 양극화로 나타난 소득 격차는 사회 안정을 해치고 인간 존엄을 앗아갈 수준으로 커지고 있다. 협동적 사회관계를 지키는 도덕의 힘은 갈수록 약해지고 있다. 물질주의가 인간 존엄을 갉아 먹고 있다.

중세신학의 상징 토마스 아퀴나스는 “극한 상황에 몰린 사람이 남의 소유물을 몰래 가져다 쓰는 것은 도둑질이 아니다. 살아남기 위해서 취한 것은 그 필요에 의해서 남의 소유물이 아니다”라고 했다. 가톨릭은 지금도 이를 수용하고 있다. 현 교황 프란치스코 1세도 찬성하고 있다. 예수에게 부자 청년이 자신은 십계명을 충실히 지키는데 천국에 가려면 무엇을 더 해야 하는지 물었다. 예수가 답하기를 “그대가 가진 것을 모두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십시오”라 했다. 공동체는 약자를 따뜻하게 감싸 품을 때 지속가능하기 때문이다.

무한 경쟁 속에 사람과 돈의 가치가 역전되었다. 목적과 수단이 전치된 기이한 현상들이 다시 폭증하기 시작했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나누어져 차별이 일상화되었다. 자본은 폭압적인 줄서기를 강요하고 사회적 약자는 밀리기만 했다. 미다스의 손이 지배하는 사회가 되었다.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다시 새로운 인간주의를 이상으로 삼아 싸워야 하는가? 고장 난 자본주의를 고쳐 써야 하는가? 현실적으로 다가오는 답은 두 가지다. 하나는 기부이고 다른 하나는 세금이다.

효율적 이타주의, 하나보다는 여럿을 위해

지구에서 가장 많은 재산을 가진 빌 게이츠는 기부를 강조하고 양극화의 원인을 밝힌 피케티는 세금을 강조한다. 세금은 의무지만 기부는 자율이다. 진보적 가치관을 가진 사람도 국가권력의 부정부패를 힐난하며 증세 비판에 동조한다. 복지를 위한 증세에 상층은 물론 중층과 하층까지 함께 비난했다. “증세를 말하지 않는 복지는 허구다”라고 외친 어느 정치인은 싸늘한 레이저 눈길에 쓰디쓴 고통을 겪었다. 증세는 당연한 의무로 수용되지 않고 ‘세금폭탄’이라며 백안시되고 있다. 증세를 통한 복지국가 실현은 쉽지 않다.

모두가 행복한 세상을 위해, 증세보다 기부 확대부터 먼저 살펴보는 것도 괜찮을 듯하다. 좋든 싫든 우리는 당분간 수정자본주의, 개량자본주의 수준에서 만족해야 할 듯하다. 세상의 다수가 효율적 이타주의자 운동에 동참하여 보편화된다면 그 또한 살 만한 세상일 것이다. 2015년 한국 사회 지표를 보면, 나눔 활동(기부, 자원봉사)은 현재도, 향후 의향도 계속 감소하는 추세이다. 기부경험은 29.9%가 있으며 1인당 기부액은 31만 원이다. 2013년에 비하여 기부경험은 줄고 기부액은 늘었다. 기부하지 않는 이유는 ‘경제적 여유가 없어서’가 63.5%이지만 ‘기부단체를 신뢰할 수 없거나 방법을 몰라서’가 14.1%에 이른다. 정의는 인간의 존엄성에 최우선 가치를 부여한다. 정의가 소중한 우리는 연간 소득 중 몇 %를 기부하는가? 만약 기부 의사가 있다면 우리는 어디에 기부할 것인가? 또 기부를 한다면 무엇을 우선할 것인가?

효율적 이타주의자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그들은 종래의 기부 개념을 많이 웃도는 열혈기부를 한다. 벌어서 쓰고 남은 것을 기부하는 것이 아니라 기부하기 위해 번다. 기부자들이 얻는 것과 같은 정도로 기부자와 그의 가족이 잃기 시작하는 시점에 이를 때까지 기부를 하고자 한다. 감정이입과 공감보다는 논거에서 기부의 동기를 부여받는다. 언론에 표출된 안타까운 사연에 감정적으로 공감하여 기부하기보다는 비용효과를 따져 검증된 단체에 기부한다. 대학이나 예술 활동에 기부하기보다는 더 큰 고통이 있는 곳에 기부하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생각한다. 자선단체의 효율성을 평가하여 기부한다. 세금처럼 기부에도 누진율을 적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효율적 이타주의자들도 행복의 원천은 가족과 친구다. 하지만 행복과 사회적 유대감은 불가분 관계임을 분명히 한다. 가족을 특별히 고려하지만 자녀에게 무한정 베풀지 않는다. 대신에 소득의 일부를 효율적 단체에 기부함으로써 생명을 살리고자 한다. 기부는 부자만 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타인의 복지에 대해 진중하게 생각한다. 기부를 얼마나 하는 가보다 자신에게 얼마를 남기는가를 고민한다. 자신의 적정한 필요를 초과하는 것은 과감히 기부한다. 사치는 당연히 배격한다. 개인과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중시하고 이를 위해 새로운 사고와 삶의 방향을 모색하고 실천할 의지가 높은 사람들이다. 나아가 불특정 환자의 소생을 위한 대가 없는 장기 기증까지도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효율적 이타주의자들의 목표는 분명하다. 선의 실천을 최대화하려고 한다. 장소, 종교, 인종을 가리지 않고 세상에 존재하는 고통을 줄이기 위해 최대의 효과를 얻는 기부를 한다. 동물의 고통도 고려한다.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을 추구한다. 이들의 동기는 인류에 대한 보편적 사랑의 마음이나 정서적 공감이 아니다. 이성의 명령이 동기다. 전체의 선을 중시하는 이성이 우리 마음에 열정과 감정을 일으킨다고 생각한다. 기질이나 포부, 애착에 따른 기부보다는 이성에 기초한 윤리적 행동을 선호한다. 삶의 목표에 대한 진지한 이성적 판단의 결과가 효율적 이타주의다.

물은 결코 높은 곳으로 흐르는 법이 없다. 반드시 낮은 곳으로 흐른다. 이타주의는 역주행의 희생이 아니다. 덧없는 소비에 대한 강박은 오히려 행복으로부터 우리를 멀어지게 한다. 소비를 줄여 기부하는 것이 자신의 일상을 해치면서 종교적 교리를 행하자는 것은 아니다. 소득이 기본적 필요를 채우고 경제적 안정을 가져다줄 정도면, 소득 증가가 행복에 미치는 영향은 미미하거나 없다. 따뜻한 인간관계가 행복에 더 중요하다. 행복은 돈으로 살 수 없다. 기부와 행복은 양방향 인과관계다. 세상과 자신의 도덕적 의무에 대해 합리적 믿음을 가지면 자존감은 저절로 견고해진다. 작더라도 타인에 대한 배려를 실천하는 우리는 이타주의자다. 어렵지 않다. 다만 조금 더 효율적으로 이타하자. 내가 살리는 생명이 결국에는 내 생명이다.

효율적 이타주의자

피터 싱어 저 | 이재경 역 | 21세기북스 펴냄

예일대학교 캐슬 강연을 토대로 만들어진 책이다. 저자는 나눔 운동의 시작점을 제시하며 자선과 기부에 대한 가이드라인을 그려준다. 또한 ‘반짝’ 기부자들의 환상을 깨고 ‘묻지마’ 자선단체들의 투명성을 요구하며 감정적 기부의 단점을 지적하는 한편, 진정으로 착한 행동이 무엇인지 새롭게 정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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