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저널 그날

개항 이후 정부에서 근대 교육을 시작하다

육영공원의 설치와 운영

현재 서울시립미술관이 자리한 서소문동 38번지 일대는 과거 대법원이 있었던 곳이고, 그 이전 일제강점기 때는 경성법원이 있었던 자리이다. 그러나 이보다 훨씬 더 거슬러 올라가면 한때 조선총독부 임시토지조사국이 있었고, 또 그에 앞서 독일영사관이 있었으며, 그 이전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관립 근대 교육 기관인 육영공원이 있었다. 육영공원을 통해 우리나라 근대 교육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되짚어보기로 하자.

글. 최준채 선생님(청담고등학교)

초기 서소문에 있었던 육영공원 전경

1882년 조·미 수호 통상 조약이 체결되고, 그 후속 조치로 1883년 보빙사를 파견한 이후 고종은 근대 학교 설립을 추진했습니다. 1884년 9월 초 고종은 육영공원의 설치를 승인했고, 9월 10일 주한 미국 공사 푸트가 본국에 젊은 교사를 선발해 보내달라는 요청서를 발송했습니다. 이에 미국 정부가 3명의 교사를 선발하게 됩니다. 이들이 바로 육영공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던 교사로, 23세의 헐버트, 33세의 벙커, 28세의 길모어입니다. 이들은 1884년 일어난 갑신정변으로 인해 1886년 7월에야 입국했고, 그해 9월 육영공원이 설립되었습니다.

육영공원은 좌원(左院)과 우원(右院)으로 구분하여 학생들을 선발했습니다. 좌원에서는 정원 10명으로 과거에 합격한 젊은 관리를 선발해 한문, 경사, 서양어를 학습하게 하고, 우원에서는 정원 20명으로 15세부터 20세에 이르는 총명한 자를 선발해 독서, 습자, 산학, 지리, 문법 등을 학습하게 했습니다. 이를 통해 육영공원의 목적을 유추하자면 외국어를 잘 아는 신식 관리를 양성하는 데 있었던 것이지요.

육영공원의 강의는 영어로 진행되었고 또 교과서도 영어로 쓰인 것을 사용했습니다. 개교 초에는 영어를 아는 사람이 없었으므로 알파벳부터 시작했으며, 주로 회화 위주의 수업을 했습니다. 외국어 이외의 다른 과목 수업도 모두 영어로 진행되었습니다. 게다가 쉬는 시간에도 영어를 사용하도록 했다고 하니, 오늘날 영어존이 여기서 시작된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육영공원 학생들의 기억력은 매우 좋아서 학습 진도가 아주 빨랐으며, 대략 한 학기 정도의 수업을 받고 나면 웬만한 정도의 영어 대화가 가능했다고 합니다. 육영공원에서 학생들에게 가장 인기 있었던 과목은 지리입니다. 당시 외국에 대한 지식이 거의 없었던 학생들은 세계지리 과목에서 각국에 대한 놀랍고도 신기한 여러 가지 지식을 얻고 기뻐했던 것입니다. 이에 교사였던 헐버트는 그들의 지적 욕구를 충족시켜주기 위해 <사민필지>라는 세계사와 세계지리에 대한 책을 순 한글로 써서 세상에 내놓기까지 했습니다.

육영공원의 수업 장면과 교사 헐버트

육영공원의 학생 선발 방식은 고위 관리들에 의한 추천이었습니다. 첫해에는 10일 동안 추천을 받아 좌원에 13명, 우원에 22명을 선발했으며, 1889년까지 육영공원을 졸업했거나 재학 중인 학생은 총 107명이었습니다. 이 가운데는 주프랑스 공사를 지낸 민영돈, 주영국 공사였다가 을사늑약 체결 후 런던에서 자결한 이한응 등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당시 육영공원이 글로벌 인재 양성에 공헌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을사늑약 체결 당시 총리대신이었던 이완용도 육영공원 출신이었습니다. 정부가 유능한 관리 양성을 목적으로 설립 운영한 학교에서 매국노가 탄생했다는 사실은 씁쓸하기 짝이 없습니다.

육영공원은 학생들에 대한 대우도 매우 좋았습니다. 기숙사생들에게 무료로 침식을 제공했고, 책도 무료였습니다. 거기에다 담뱃값이라는 명목으로 한 달에 6원씩 지급했는데, 당시 설렁탕 한 그릇 값이 2전 5리였으니까 6원이면 설렁탕 240그릇을 사 먹을 수 있는 큰 금액이었습니다. 예산이 열악했던 당시 정부로서는 어쨌든 상당한 예산을 투입한 학교 운영이었지요.

육영공원의 학교 규칙은 매우 엄격했습니다. 기숙사 생활을 하는 우원 학생들은 기상이나 취침 등의 시간도 철저히 지켜야 했습니다. 양력과 음력을 참작하여 정한 방학과 휴일 외에는 결석할 수 없으며, 월말과 연말, 대고(大考)라 하여 3년마다 치는 시험 등 세 종류의 시험이 있었는데, 대고에 급제한 학생은 졸업시켜 취직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학생들은 규칙이 너무 까다롭다는 이유로 늘 불평이었습니다. 신학문에 대한 이해는 전혀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절반이 현직 관리인 좌원 학생들은 신학문에 대한 관심과 열망이 적었고, 그들은 글공부가 출세와 직결한다는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급기야 학생들의 요청으로 수업 시간도 6시간에서 4시간으로 단축되었고, 가사와 공무를 핑계로 결석하기 일쑤였습니다. 교사였던 헐버트는 수업 시간 단축에 반대하여 고종에게 상소를 올리기도 했지만 정부 관리들도 학생들의 태만을 통제할 수 없었습니다. 결국 미국인 교사들은 이에 실망하여 계약 기간을 마치고 돌아갔습니다. 길모어는 1889년, 헐버트는 1894년에 각각 사임했습니다. 벙커만은 교사직에 그대로 머물러 있다가 육영공원 폐지 이후 1895년 7월부터 배재학당으로 자리를 옮기게 되며, 그곳에서 아펜젤러가 사망한 1902년 이후 제2대 총리교사 직책을 물려받았습니다.

육영공원을 담당한 관리들의 인사이동이 잦았고 점차 육영공원에 대한 흥미를 잃어 그 존속은 명색만 남게 되었습니다. 결국 육영공원은 1894년 운영을 영국인 허치슨에게 맡기게 되었고, 이에 따라 학교 이름이 영어학교로 개편되면서 육영공원은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육영공원은 실패로 끝났다고 평가해도 무방할 듯합니다. 물론 근대 교육에 대한 정부의 이해 부족이나 예산상의 문제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학생들이 젊은 서양 교사의 지시를 이행하지 않는 등 교칙 위반이 폐교의 심각한 원인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날 학교에서 겪는 문제들을 초기의 근대 학교에서도 겪었다는 사실에 마음이 착잡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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