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저널 그날

마지막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 경교장

백범 김구와 경교장 이야기

글. 박광일(역사여행가) / 그림. 이철민

영화 <대장 김창수>가 상영됐다. 그런데 영화 소개글과 영화를 본 사람들이 쓴 글에 흥미로운 내용이 있다. ‘김창수는 누구일까?’ 처음에는 웃자고 그러는 줄 알았다. ‘설마, 김구 선생을 모르겠어?’ 그런데 글에 달린 반응을 보면 사뭇 진지하게 ‘몰랐다!’는 고백이 나온다. 속으로 놀랐다. 그리고 다시 현실을 돌아보게 됐다. 김구 선생에 대해 우리가 어떻게, 얼마나 알고 있는지 생각해봐야겠다고.

먼저 영화 이야기를 해야겠다. 영화는 1896년 3월 8일 황해도 안악군 치하포에서 일어난 사건을 배경으로 한다. 한 조선 청년이 같이 묵고 있던 숙소에서 만난 일본인 스치다 조스케를 죽였다. 청년은 이 일본인을 을미사변과 관련 있는 일본군 밀정으로 본 것이다. 청년은 자신이 한 일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본인의 이름과 주소를 적어 숙소에 붙였다. 그리고 몇 개월 뒤 체포되어 인천감리서에 갇힌다. 이 사건의 주인공이 바로 김창수이며, 김구 선생의 청년 시절 이름이다. 이후 청년 김창수는 이름을 두 번 바꾼다. 25세 때 김구(金龜)로, 37세 때 우리에게 익숙한 김구(金九)란 이름과 백범(白凡)이란 호를 쓰기 시작한다.

아마도 한국사람 가운데 김구 선생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김구 선생을 존경하는 이유를 물어보면, 대부분 대한민국 임시정부(이하 임시정부)를 이끈 공을 존경의 이유로 든다. 그런 까닭에 1919년 임시정부 수립 이전 김구 선생의 삶에 대한 관심이 적었고, 그래서 <대장 김창수>처럼 잘 몰랐던 김구 선생의 젊은 시절을 조명하는 영화를 기획하게 된 것 같다. 그러므로 김구 선생을 존경한다면 임시정부를 제대로 아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는 왜 임시정부라고 하면 김구 선생을 제일 먼저 떠올릴까? 이승만, 이동휘, 안창호 등 성립 요인들은 물론 양기탁, 이상룡, 신규식 등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로 훌륭한 분들이 많은데도 말이다. 이와 관련해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은 김구 선생의 뚝심이다.

임시정부라고 하면 거창해 보이지만 속사정은 늘 복잡했고, 그래서 운영하기 어려웠다. 김구 선생이 처음부터 중책을 맡지도 않았다. 그러던 중 김구 선생이 1926년 51세의 나이로 국무령으로 선출된 이후 임시정부를 상징하는 인물이 됐다. 그리고 1932년 임시정부는 위험과 기회를 동시에 맞이한다. 상해 훙커우 공원의 윤봉길 의사 의거로 한국과 중국이 같은 운명임을 이해한 국민당 정부가 비밀리에 임시정부를 돕기 시작했다. 하지만 일본의 압박이 심해지며 임시정부는 존재 자체가 위험해졌다. 곳곳에 놓인 일본의 마수를 벗어나기 위해 임시정부와 요인들은 상해를 벗어나 항저우(1932), 전장(1935), 창사(1937), 광둥(1938), 류저우(1938), 치장(1939), 충칭(1940)으로 옮겨 다녀야 했다. 이 같은 이동 과정에서 죽음으로 이별하는 동지들도 있었지만, 임시정부를 이탈하는 사람들도 생겨났다. 위기의 시절, 조직이 살아남기 위해 중심을 잡아주는 인물이 필요한데, 그 역할을 바로 김구 선생이 맡은 것이다.

김구 선생이 지키려고 했던 임시정부. 어떤 의미가 있을까? 1919년 3.1운동을 계기로 1919년 4월 성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 나아가 9월에는 한성정부와 노령정부를 통합한 임시정부에서 처음으로 ‘대한민국’이란 국호가 나왔다. 당시 임시정부가 미국 교포를 대상으로 만든 국채에도 명확하게 영어로 ‘Republic of Korea’라고 적혀 있다. 그런데 정부가 다스리는 국가라고 하면 영토와 주권, 국민을 아울러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임시정부의 취약함을 얘기한다. 또 대한민국 성립에도 의문을 표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것은 사전적 의미로, 당시 긴급한 상황에 빠진 우리 민족에게는 적절치 않다. 강도와 같은 일제에 국토를 빼앗기고, 국민들은 압제에 신음하고, 그들이 행사하던 주권도 되찾아야 한다. 그래서 정식 정부가 아니라 ‘임시정부’다. 언젠가 국토, 국가와 함께 주권을 되찾는 날 ‘임시’를 뗄 것이다. 국회 격인 의정원에도 ‘임시의정원’이란 이름을 붙인 이유다.

임시정부는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의 바탕이 됐다. 헌법 전문에도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는 내용이 들어갔으며, 1948년 8월 15일 이승만 대통령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때 연호를 ‘대한민국 30년’으로 표현했다. 1919년 대한민국이 수립된 것이라는 얘기다. 만에 하나 임시정부의 역사가 끊기거나 사라졌다면 그런 표현을 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런 역사의 중심에 김구 선생의 강력한 지도력이 있었다. 그러므로 김구 선생이 지키려고 했던 임시정부는 대한민국이기도 하다.

이처럼 중요한 의미가 있는 임시정부의 모습을 살펴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아마도 가장 좋은 곳은 임시정부 청사다. 다행히 1919년부터 1945년까지 임시정부가 있던 곳인 중국에서 임시정부 청사를 찾아볼 수 있다. 많은 시간이 흘러 그 모습을 살펴볼 수 없는 곳도 있지만, 중국 정부는 한중협력의 증표로서 임시정부 청사를 중요하게 관리하고 있다. 시급, 성급 지위의 유적으로 보존된 곳도 있고, 항저우 임시정부 청사였던 곳은 국가급 유적으로 관리하고 있다. 하지만 의아함을 느끼는 경우도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임시정부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는 곳이 생각나지 않기 때문이다. 근현대사를 살펴볼 공간이 여럿 있지만 임시정부를 단독으로 살펴볼 곳은 없다.

임시정부 청사 얘기를 하기 위해 다시 김구 선생 이야기로 돌아가야 할 것 같다. 광복을 맞이했지만 미 군정은 임시정부를 인정하지 않았다. 임시정부 요인들을 개인자격으로 귀국하도록 했다. 하지만 김구 선생은 자신이 돌아왔으니 임시정부도 돌아왔다고 선언했다. 그러므로 김구 선생이 머문 곳이 마지막 임시정부 청사라고 할 것이다. 그 장소가 바로 경교장이다.

1990년대 중반 경교장 답사를 간 적이 있다. 병원 로비를 지나 2층의 좁은 전시 공간을 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김구 선생, 더 나아가 임시정부를 생각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해 보였다. 다행히 최근 복원 공사가 이루어져 경교장은 김구 선생이 머물던 모습으로 돌아왔다. 이제 건물의 모습을 되찾았으니 그 의미를 되찾아야 한다. 버스나 지하철역에서 이정표에 제대로 경교장을 표시하는 것이다. 모 병원에 대한 얘기와 함께 경교장이 있음을 알려주면 좋겠다. 그리고 ‘경교장: 임시정부청사’로 적으면 더 좋겠다. 그 이정표를 본다면 경교장으로 가는 사람들의 마음가짐이 조금 달라질 것 같기 때문이다.

박광일

성균관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했으며, 역사여행가로 활동하고 있다. KBS <여유만만>, EBS <숨은한국찾기>, KBS1라디오 <오언종의 생생라디오매거진> 등 여러 방송에서 패널로도 활동 중이다. 쓴 책으로는 <우리아이 첫 경주여행(공저)>, <아빠의 답사혁명> 등이 있다.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