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 속 서울교육

교육에서 같아야 할 것과 달라야 할 것

공자의 평등교육과 개성, 자발성 교육

2500년 전 평등교육을 주창했던 공자. 그는 모든 사람에게 공평한 교육 기회를 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또 자발성을 강조하며 제자의 개성과 처지를 고려해 창의성을 살리는 교육 방법을 고민했다. 평등교육과 개성교육, 자발성. 이는 서울교육이 추구하는 핵심 가치, 철학과도 궤를 같이한다.

글. 이상수(서울시교육청 대변인, 철학 연구자) / 그림. 이철민

전통 시대 동아시아 사회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한 사람을 꼽으라면 아마도 공자가 첫손가락을 차지할 것이다. 그는 지난 2000년 동안 성인(聖人)으로서 수많은 왕조의 숭배를 받았지만, 반면에 엄청난 비난과 타도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허심하게 바라보면 공자가 위대한 인물이었음은 틀림없다. 그러나 봉건 통치자들이 공자를 성인으로 숭상하는 바람에, 공자는 봉건 통치자들과 더불어 타도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잘못은 공자를 성인으로 만든 이들에게 있지 공자에게 있지는 않다.

공자의 일생은 기구하기 짝이 없다. 공자의 아버지는 66살에 18살이던 안 씨 여인과 ‘야합(野合)’해서 공자를 낳았다. 공자는 3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와 함께 집에서 쫓겨났다. 공자 나이 17살에는 어머니마저 여의었다. 이런 기록을 보면 공자가 편모슬하에서 매우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냈으며, 성장기에 집안에서 제대로 된 교육이나 보살핌을 받기가 매우 어려웠을 것임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그럼에도 공자는 매우 반듯한 교육자이자 인격자로 성장했다. 이것은 매우 불가사의한 일이다. 공자는 아무리 어려운 환경에서 태어나더라도 인격자로 성숙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는 점만으로도 매우 위대하다.

공자는 당시 귀족들이 독점하고 있던 교육을 개인들에게 펼친 최초의 사학(私學) 교육자였다. 당시는 귀족의 자제들이나 여섯 가지 기예[六藝]를 익힐 수 있었으나, 공자는 가르침을 청하는 모든 이들에게 가르침을 베풀었다. 그는 스스로 “가르침을 펼 때는 무리를 가르지 않는다.”(有敎無類。 《論語》<衛靈公> 15-39)고 말했다. 그는 또 “말린 고기 한 묶음 이상을 가지고 와서 가르침을 구하는 이에게, 나는 일찍이 가르쳐주지 않은 적이 없었다.”(自行束脩以上, 吾未嘗無誨焉。 <述而> 7-7)라고도 했다. ‘말린 고기 한 묶음’은 당시 가장 낮은 수준의 예물이었다. 이는 최소한의 성의 표시만 해도 가르침을 폈다는 뜻이다.

공자는 매우 가난한 환경에서 교육의 어떤 혜택도 받지 못하고 성장했지만, 세상에 대해 복수심을 품는 대신 모든 사람에게 교육을 받을 공평한 기회를 주어야 한다는 생각을 품었다. 공자의 이런 생각은 “태어난 집은 다르더라도 받는 교육은 평등해야 한다”는 서울교육의 믿음과도 일치한다. 2500년 전의 인물조차 평등교육을 주창했는데, 아직도 교육 불평등이 사회 불평등을 확대 재생산하는 구조를 깨뜨리지 못한 한국은 여전히 갈 길이 멀다.

공자가 평등교육의 신념이 있었다고 해서 모든 사람에게 똑같은 교육을 베풀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다. 되레 공자는 개성교육의 주창자였다.

가령 자로가 “(옳은 일을) 들으면 바로 실천해야 합니까?”라고 묻자, 공자는 “아버지와 형이 있는데 어찌 들으면 바로 실천할 수 있겠는가?”라고 답하여 제동을 걸었다. 그런데 염유가 “(옳은 일을) 들으면 바로 실천해야 합니까?”라고 같은 질문을 하자, 공자는 “바로 실천해야 한다”고 답했다. 이 문답을 옆에서 보고 있던 다른 제자 공서화가 물었다. “자로가 ‘옳은 일을 들으면 바로 실천해야 합니까?’라고 물었을 때는 선생님께서 ‘아버지와 형이 있지 않느냐’고 하시고, 염유가 ‘옳은 일을 들으면 바로 실천해야 합니까?’라고 물었을 때는 선생님께서 ‘바로 실천해야 한다’고 답하셨습니다. 제가 헷갈려서 감히 그 이유를 묻습니다.” 그러자 공자가 답했다. “염유는 뒤로 물러나기 때문에 앞으로 나아가도록 한 것이고, 자로는 다른 사람들보다 앞서나가기 때문에 물러나도록 한 것이다.”(<先進> 11-21)

공자는 정답을 가지고 있다가 그것을 되풀이해서 알려준 사람이 아니다. 그는 누가 물었느냐에 따라 답을 달리했다. 가령 ‘어짊[仁]’에 대해서 수제자인 안연이 물었을 때는 “자기를 이기고 예(禮)로 돌아가는 것”(克己復禮爲仁。 <顔淵> 12-1)이라고 답했지만, 사마우(司馬牛)라는 제자가 같은 질문을 던졌을 때는 “어진 사람은 말하는 것을 어렵게 여긴다”(仁者, 其言也訒。 같은 편, 12-3)고 했다. 이렇게 제자의 개성과 처지에 따라 늘 서로 다른 답을 준 것은 공자의 매우 독특한 교육방법이다. 공자의 이런 생각은 “맹목적인 경쟁 제일주의와 일등주의 교육을 넘어서서, 학생 한 사람 한 사람의 개성과 소질을 존중하는 ‘온리 원’ 교육”을 추구하는 서울교육의 철학과도 궤를 같이한다.

마지막으로, 공자는 학생이 배우고자 하는 마음이 간절하지 않으면 가르쳐주지 않았고, 네모 가운데 하나를 일러주었을 때 나머지 셋을 유추해내는 노력이 없으면 더 가르쳐주지 않았다. 공자는 말한다.

왜 그런가. 교육의 가장 큰 난점은 자발성에 있음을 공자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이 아직 배울 열의가 없는데 억지로 주의해봤자 그게 공부가 될 리 없다. 공부란 지식의 축적이 아니라 사람을 성숙시키는 과정이다. 지식의 축적은 주입으로 가능할지 몰라도, 사람의 성숙은 오로지 자신의 자각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그래서 공자는 불분불계(不憤不啓, 알려고 애쓰지 않으면 일깨워주지 않는다)와 불비불발(不悱不發, 표현하려 애쓰지 않으면 틔워 주지 않는다)을 외친 것이다. 결기가 날 정도로 간절하지 않으면 깨달음이 없고, 자기를 표현하기 위해 애태우지 않으면 자기가 누구인지 알지 못하고 간다.

공자는 또한 거일반삼(擧一反三, 한 모서리를 들어주면 나머지 세 모서리를 들고 돌아오라)을 요구하는 사람이다. 스승에게 배운 것, 삶에서 얻은 것을 응용해 새로운 지식과 지혜를 산생해내지 못하면 제대로 소화한 게 아니기 때문이다.

공자가 불분불계, 불비불발, 거인반삼을 교육의 원칙으로 삼은 것은, 학생의 자기주도 학습 능력 향상과 창의적 문제 해결 능력을 강조하는 서울교육의 철학과도 일맥상통한다.

2500년 전, 사학(私學)의 여명기에 그 개척자인 공자가 평등교육과 개성교육, 자발성을 강조한 것은, 아마도 평등과 개성, 자발성이 교육에서 추구해야 할 가장 근본적인 가치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 말을 달리하면, 진정한 스승이란 어떤 경우에도 배우고자 하는 이를 외면하지 않는 사람이란 말이다. 그는 또한 맹목적인 지식 전달자가 아니며, 배우는 이의 처지와 개성을 고려하고 창의성을 살리기 위해 최선의 교육 방법을 늘 고민하는 사람이다. 이것이 바로 서울교육이 추구하는 핵심적 가치다.

“알려고 애쓰지 않으면 일깨워주지 않고,
不憤不啓
표현하려 애쓰지 않으면 틔워주지 않는다.
不悱不發
한 모서리를 들어주었는데도
나머지 다른 세 모서리를 헤아려 들고 돌아오지 않는다면

擧一隅不以三隅反
되풀이하여 가르쳐주지 않는다.”
則不復也

<述而> 7-8

이상수

한겨레신문에서 17년 동안 기자로 일했으며, 2014년부터는 서울시교육청 대변인으로 일하고 있다. 연세대에서 제자백가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저서로 <운명 앞에서 주역을 읽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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