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획 끝에서 맞이하는 새로운 시작, 졸업

추억으로 충분하다

성취한 결과물이 아닌 지나온 과정 되돌아보기

6년 혹은 3년,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을 학교에서 보낸 뒤 지나온 시간을 되돌아보고 새로운 출발을 다짐하는 졸업. 교육에서 졸업은 어떤 의미일까? 기록으로 남겨 증명할 만한 성취를 이루어야만 의미있는 졸업인 걸까? 졸업의 의미를 되새기며 학교는 어떤 공간이어야 하는지, 진정한 교육의 목적은 무엇인지 생각해본다.

글. 장희숙(<스스로 서서 서로를 살리는 교육 민들레> 편집장)

졸업을 앞둔 대학생의 고민

작년 이맘때, 한 대학생이 출판사를 찾았다. 출판과 함께 교육단체 역할도 하는 민들레에는 다양한 이들이 드나드는데, 혼자서 불쑥 찾아오는 청년은 흔치 않아서 무슨 일인가 싶었다.

곧 졸업을 앞둔 대학 4학년생의 고민은 공교롭게도 ‘교육이란 무엇인가’였다. 교사가 되고 싶어 사범대에 진학했지만, 4년 동안 ‘좋은 교사가 되기 위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어디에서도 배울 수 없었다는 것이다. 교육이란 무엇인지, 교육에서 교사는 어떤 존재인지, 현장에서 아이들을 만나기 위해 무엇을 준비해야 할지 궁금해하는 자신이 늘 이방인 같았다고. 대학교 1학년 때부터 임용고시와 토익 준비에 여념 없는 학과 친구들에게 교육 세미나 모임을 만들자는 자신의 제안은 시간을 낭비하는 일로 비쳤고, 교수들도 “열심히 안 하면 학원 강사밖에 할 게 없다”며 임용고시 준비를 종용한다고 했다.

대학생들이 일부러 졸업을 유예한다는 얘기도 들려줬다. 졸업 후 취업 준비 기간이 길어지면 무능한 것으로 여겨지므로, 휴학으로 학생 신분을 유지한 채 입사 시험을 보러 다닌다는 것이다. 취업을 못하면 남 보기 부끄러워 졸업식에 참석하지 않는 학생도 많다고 했다. 졸업이 그간의 과업을 성찰하고 마무리하는 의식이 아니라 성과 중심의 평가제로 인식되는 적나라한 현실이었다.

목적을 향하는 공부

많은 사람이 인생의 목표를 향해 달려간다. 시기별로 구체적인 달성 목표를 정하기도 하고, 아동이나 청소년들의 경우 진학 단계에 따라 그 목표가 주어지기도 한다. 주어진다고 표현하는 것은, 대체로 관행에 의한 동일한 목표로 그 방향이 집약되어 있기 때문이다. ‘원하는 상급학교로 진학하는 것’. 그러나 목표를 지향하는 행위는 자칫 결과를 중심에 두느라 과정을 간과하는 우려를 범할 수도 있다. 인간이 성장하는 데 필요한 것은 충분한 ‘시간’이며 중요한 것은 그 시간을 보내는 ‘과정’이다. 훌륭한 교육이라면 결과만큼이나 과정도 풍요로워야 한다. 과정에서 충분히 의미를 찾은 사람은 설사 그 결과가 만족스럽지 못하더라도 그것을 실패나 낙오로 여기지 않는 힘을 얻게 된다.

교육에서 ‘졸업’이란 무엇을 성취했는지 확인하고, 그 성취로 또다시 무엇을 성취할 것인지를 다그치는 과정이 아니다. 약속된 시간 속에 그 과정이 어떠했는가를 반추하고 자신에게 의미 있는 시간을 끌어내는 행위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시나브로 물들어 다른 사람으로 변해가도록 하는 것이 교육의 힘이다. 졸업은 자신도 모르는 그 ‘시나브로’의 시간을 자신의 언어로 해석할 수 있게 돕는 행위이다. 교육이 그 역할을 제대로 해내기 어려운 시대라 하지만, 여전히 많은 아이들은 학교라는 공간에서 긴 시간을 보내며 졸업장이나 자격증으로는 모두 담아낼 수 없는 자기 인생의 이야기를 만들어가고 있다.

매일 교실에서 엎드려 자는 인문계 대포자(대학포기자) 학생이 그래도 학교에 가는 이유는 ‘친구’와 ‘급식’이 있기 때문이라 한다. 우스개처럼 들리지만 친구와 급식이 그 학생에게 의미를 선사했다면 교사의 수업보다 더 뛰어난 배움의 촉진제가 된 것이다. 다양한 방식으로 개인에게 의미 있는 졸업이 되기 위해서 학교는 ‘가고 싶은 곳’이 되어야 한다. 의례적으로 다니는 곳이 아니라, 의미 있게 머무는 곳이 될 때 학교는 그 기능을 회복할 것이다. 졸업의 자격은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즐기는 과정에서 저절로 주어지는 것 아닐까.

영화 <무현, 두 도시 이야기>에서 고 노무현 대통령은 국회의원 후보시절 유세장에서 어린아이들이 장난스럽게 내미는 종이에 일일이 사인을 해주며 이렇게 말한다. “그래도 이런 작은 성취가 쌓여서 밝은 성격이 되지 않을까요?” 자잘한 성취와 사소한 기쁨 덕에 자신이 얼마나 성장했는지는 스스로가 가장 잘 안다. 삼엄한 생존의 시대에 추억이 밥 먹여주느냐 하지만, 어쩌면 추억만으로 충분할 수도 있다. 성적표나 졸업장, 생활기록부로는 증명할 수 없지만 지나온 3년, 6년의 과정을 반추하며 자기만 아는 반짝이는 별 같은 추억이 떠오른다면, 그것들이 인생의 어느 굴곡을 넘어서는 동력이 될지도 모를 일이다.

행복이라는 감정의 유토피아

작년, 한 학교의 졸업식에 갔다. 공간민들레에서 일 년을 보낸 아이들의 발표회이자 축제 같은 행사였다. 원형극장처럼 생긴 행사장 계단에 쪼그리고 앉아 마지막 무대를 내려다보고 있는데, 친구들 손을 잡고 노래를 부르던 한 여자아이의 눈이 반짝인다. 눈물을 꾹꾹 누르고 있는 것을 멀리서도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졸업식에서 우는 아이를 좀처럼 보기 어려운 요즘, 그 아이의 마음속엔 어떤 감정들이 차올랐을까. 이따금 스치며 바라본 그 아이의 일 년이 기쁘고, 슬프고, 힘들고, 즐거웠던 것을 잘 안다. 마지막 매듭의 순간에 만감이 교차한다는 것은 그 시간 속에 살아 있는 상호작용이 있었다는 방증이다. 그 역동적인 과정은 필히 배움과 성장을 수반했을 것이다.

사람들은 ‘행복’이라는 감정의 유토피아를 삶의 목적으로 믿고 살아가지만, 실은 행복만을 느끼고 싶다는 불가능한 꿈을 꾸는 데서 불행이 시작되는지도 모른다. 교육에서는 유독 ‘행복’이라는 단어를 추종한다. 행복하기 힘든 시스템 속에서 ‘행복 교육’이란 말을 너무 쉽게 쓰는 것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러나 오히려 행복은 불행을 외면하지 않는 것에서 오는지도 모른다. 기쁘고, 화나고, 즐겁고, 슬픈 일상의 감정을 두려움 없이 받아들이는 법을 배우는 것 또한 교육의 중요한 목적일 것이다. 그런 면에서 학교라는 공동체는 그 숱한 감정의 상호작용을 만들어낼 수 있는 좋은 공간이다.

코끝이 빨개지고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 그러나 끝내 눈물을 떨구지 않고 그 아이는 마지막까지 노래를 불렀다. 보는 이들도 울컥해진 사이, 열일곱 아이들은 천진하게 웃으며 노래의 끝 소절을 반복했다. 일 년을 마무리하고 새로운 길에 나서는 서로에 대한 당부이자 자신과의 약속처럼 들렸다.

“이 미친 세상 어디에 있더라도 행복해야 해. 넌 행복해야 해. 행복해야 해.”
- 브로콜리 너마저 <졸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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