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저널 그날

무명 씨, 만세 씨

역사 속에 숨겨진 여성 독립운동가

“독립운동에는 남녀노소가 따로 없다.” 한국의 잔 다르크라 불리는 지복영 의사가 남긴 말이다. 그러나 여성 독립운동가를 떠올려보라는 질문을 받으면 대부분 유관순 열사 정도에서 머뭇거리게 된다. 여성 광복군으로 입대해 광복 때까지 일본에 항거했던 지복영 의사를 기억하는 사람도 많지 않다. 삼일절을 맞아 그녀들의 삶이 독립운동과 어떻게 연결됐으며, 왜 그들을 기억해야 하는지 알아본다.

글. 이은주(문화유산교육연구회 연구원) / 그림. 이철민

1997년 IMF 외환 위기 시절 ‘금 모으기 운동’은 대한민국의 부채를 갚기 위해 국민들이 자발적인 희생정신으로 금을 내어놓은 운동이다. 그렇다면 국가 경제의 어려움을 극복하려 했던 일은 역사적으로 처음이었을까? 1907년 여성이 주체가 되어 반지, 비녀, 노리개 등 패물을 기증해 대한제국의 부채를 갚고 일본의 침탈 야욕을 막으려 한 ‘국채보상운동’이 있었다. 이러한 여성들의 노력은 1920년대에 일어난 ‘물산장려운동’으로 꽃피게 된다. 이를 통해 생활 곳곳에 불공정 수입품인 일본 물품을 멀리하고 국산품과 토산품을 사용해 일본의 경제적 수탈에 저항했다. 역사적으로 국채보상운동과 물산장려운동은 대표적으로 여성이 주체가 된 ‘삶 속의 독립운동’을 보여주는 예이다.

우리가 가진 독립에 대한 가장 강렬한 기억은 모든 국민이 참여한 3·1 독립만세운동으로, 독립에 대한 민족의 열정을 세계 각국에 보여줬다. 독립만세운동의 주역은 남성만이 아니다. 여학생, 기생, 주부 등 많은 여성이 주축이 됐고, 그 중심에는 이화학당 내 비밀 조직인 ‘이문회’에 속한 유관순 열사도 있었다. 또한 신간회와 자매 단체 성격으로 설립된 근우회는 항일 여성 운동 단체로서 항일 구국운동 및 여성 지위 향상을 목적으로 봉건적 굴레와 일제 침략으로부터 해방되기 위해 투쟁했다. 서울 본부를 중심으로 전국 각지와 일본 및 만주에 약 70여 개 지부, 2,900여 명의 회원 을 확보해 항일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여성 독립운동가’라는 단어에는 그들이 감내해야 했던 ‘아내의 삶’, ‘어머니의 삶’, ‘독립운동가의 삶’이 녹아 있다.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을 한다는 것은 목숨을 조국에 맡기고 모든 것을 헌신하는 일이었다. 이에 남편을 대신해 가정을 책임진 여성들은 노동을 통해 가정을 지켰고, 자녀를 교육했다. 이러한 노력으로 그녀의 자녀들은 또 다른 독립운동가로 자랐다. 그녀들은 열악한 환경에서도 독립자금을 모으거나 일본의 침략행위를 다른 국가에 알리는 등 다양한 방법으로 독립운동에 힘썼다. 이렇듯 그녀들의 삶이 곧 독립운동이었다.

안중근 의사의 어머니로 알려진 여성 독립운동가 조마리아 열사의 삶도 그러하다. 열사의 본명은 조성녀로 1862년 태어났다. 1897년 천주교 세례를 받고 세례명 마리아로 불렸다. 조마리아 열사는 국채보상운동은 물론, 1926년 ‘임시정부경제후원회’에 참여해 활동했고, 자녀들에게 ‘애국계몽 교육’을 했다. 그 결과 네 명의 자녀 모두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첫째는 대한의군 참모중장 안중근, 둘째는 여성 독립운동가 안성녀, 셋째는 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안정근, 넷째는 임시정부 상임국무위원 안공근이다. 옥중에서 죽음을 앞둔 장남 안중근 의사에게 보낸 조마리아 열사의 편지는 ‘여성 독립운동가로서의 삶’과 그녀의 기개가 잘 드러난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네가 만약 늙은 어미보다 먼저 죽는 것을 불효라 생각한다면 이 어미는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너의 죽음은 너의 한 사람의 것이 아니다. 조선인 전체의 공분을 짊어지고 있는 것이다. 옳은 일을 하고 받은 형이니 비겁하게 굴지 말고 대의에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이니라. 아마도 어미가 쓰는 마지막 편지가 될 것이다. 네 수의를 지어 보내니 이 옷을 입고 잘 가거라.”

대한민국의 자주독립과 국가 건립에 이바지한 공로를 인정해 조마리아 열사 같은 여성 독립운동가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준 시점은 2008년(광복절)이다. 독립운동가로 훈장을 받기까지 1945년부터 60년이 넘게 걸렸다. 우리가 여성 독립운동가들에게 얼마나 무관심했는가를 증명하는 현실이다. 그러나 필자는 이러한 늦음조차 아예 없이 잊히는 것보다는 다행이라는 마음으로, 안타까운 심정으로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은 여성 독립운동가 두 분의 인터뷰 중 일부를 소개한다.

“내가 우리나라를 위해서 군복을 입는구나. 눈물을 흘리면서 입었어요.”
_ 백옥순(1911. 7. 3~2008. 5. 24)

“내가 열아홉 살 나면서… 들어갔지… 들어가서 이제 우리 여자들은 의무대 간호해주고… 남동지들이 이제 저기 공작 나가고 또 들어오고, 또 공작 안나가셔도 부대에서 또 하는 일들이 다 있잖아… 그분들이 아프던가 저거 하면 여자들이 간호대원들이 다 그 일을 맡아서 하고.”
_ 유순희(1926. 7. 15~)

독립 이후 한국전쟁과 사료 소실로 인해 우리가 알 수 있는 여성 요원들의 이름은 몇몇에 그친다. 우리가 알 수 있는 독립운동가는 1만 4779명이다. 그중 여성 독립운동가는 300명이다(국가보훈처. 2017년 8월 기준). 그녀들은 역할에 따라 명명되고 300명만 밝혀졌을 뿐 대부분 이름을 남기지는 못했다. 하지만 지금 대한민국을 사는 우리들을 남겼다. 이름을 알 수 없는 여성 독립운동가분들을 필자는 감히 ‘무명 씨’라고 불러본다.

나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검사원입니다.
나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간호원입니다.
나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조리원입니다.
나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한국 광복군입니다.
나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3·1유치원 교사입니다.

그리고 3.1 독립만세운동을 이어나가셨던 많은 분을 감히 ‘만세 씨’라고 불러본다.

무명으로 잊힌 여성 독립운동가를 되찾는 것은 우리 후손의 몫이다. 교육과 문화유산의 현장에서우리 모두 나라 사랑의 마음을 기억하고 이어나가는 또 다른 ‘무명 씨’가 되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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