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속 교육

역사 읽기, 오답노트처럼

한국 영화 <1987>

글. 이중기 / 사진제공. CJ엔터테인먼트

이름 없는 개인, 흐름이 있는 역사를 만들다

계획된 것은 아니었다. 1987년 어느 때보다 뜨거웠던 여름이 2017년, 어느 때보다 ‘뜨거운 겨울’을 만들어낼 줄은 그 누구도 몰랐을 것이다. 다시 한번 시민의 힘이 한데 모여 불의한 권력을 바로잡는 ‘영화’ 같은 일이 또다시 일어날지 몰랐을 것이고, 그렇게 힘들게 쟁취한 정의가 불과 9년 만에 하릴없이 무너져 내릴 줄도 몰랐을 것이다. 영화 <1987> 또한 계획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1987년 6월 항쟁이 일어나기 전까지의 이야기를 담은 이 작품이 2017년 3월 수많은 촛불이 한 데 모여 불의한 권력을 다시금 끌어내리는 역사와 대구를 이루리라는 것도 생각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1987’이라는 단어 자체는 매끈하다. 1986과 1988 사이 자연수이면서 1986년 12월 31일과 1988년 1월 1일을 구분 짓는 절단면과 같은 명확함을 지닌 단어다. 이렇게 명징한 단어가 영화 제목으로 쓰이면서 그 경계가 불분명해진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으로 민주 항쟁이 불티에서 불꽃으로 변해가는 모습을 담아낸 영화 <1987>에는 특별한 주인공이 없다. 다만 그 시대를 살아갔던 인물들을 조금씩 보여줄 뿐이다. 그런데도 영화는 서사의 끊김이 없다. 각각의 인물이 마치 이어달리기를 하는 달리기 선수들처럼 바통을 이어받고 달리고 또다시 바통을 이어받는 과정을 반복하기 때문이다.

역사 또한 마찬가지다. 역사는 어느 한 단면, 몇몇 중요한 숫자로만 기록되지 않는다. 역사는 수많은 작은 흐름이 큰 흐름을 만들어내는 유기적인 기록이다. 그러나 이를 총체적으로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그래서 우리는 편의상 역사를 ‘어느 한 단면’을 가지고 전체를 추론하거나, 몇몇 중요한 숫자를 통해 그 가치와 의의를 이해하려 한다. 하지만 이 방법에는 맹점도 있다. 취사선택할 수 있는 역사의 어느 한 단면은 역사를 선택하는 자의 의도에 따라 전체를 곡해할 수 있으며, 몇몇 중요한 숫자는 필요에 따라 그 가치와 의의를 입맛에 맞게 골라 선택하는 해석의 문제를 낳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역사의 작은 주체가 만나 큰 호흡을 이루는 영화 <1987>이 너무나도 명징하고, 칼로 베어낸 듯 매끈한 제목을 선택한 것은 흥미로운 역설이다.

역사의 흐름 속에서 개인은 쉽게 잊히고 간과되기 일쑤다. 역사서에서 개인의 이름을 발견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 점에서 <1987>의 접근법은 흥미롭다. 1987년에 일어난 역사적 사건을 특정 몇몇 개인이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이름 모를’ , ‘내 주변의’ , ‘나 역시 될 수 있는’ 인물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렇게 물을 수도 있다. 그날 그 자리에서는 이름 없는 개인이었던 인물이 지금 이 순간에는 ‘이름 있는’ 개인이 되어 있지 않느냐고. 타당한 지적이다. 그래서 감독은 영화 속에 유일한 가상인물을 등장시킨다. 바로 연희다.

우리가 다시 <1987>을 보아야 하는 이유

연희라는 이름은 영화의 클라이맥스를 장식하는 연세대학교의 옛 이름이자 연희동에서 따왔을 것이다. 연희동이란 이름 또한 조선시대에서 따온 이름이다. 연희동 자리에 있던 이궁인 ‘연희궁(衍禧宮)’에서 따온 것으로 한자 뜻풀이를 하면, ‘복이 흘러넘치는 궁’이라는 뜻이 된다. 하지만 영화 속 연희의 모습은 ‘복이 흘러넘쳐’ 보이진 않는다. 친구와의 만남이 시위로 엉망이 되고, 그 와중에 멋진 학교 선배를 만났지만, 그 또한 시위에 참여하는 학생이었다. 연희의 마음은 복잡하다. 달콤한 대학생활을 그리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다. 게다가 삼촌 한병용은 민주화 인사들의 가두보 역할을 하다 끝내 남영동으로 끌려가 고초를 겪게 된다. 이는 연희라는 한 개인이 처한 상황이 아닌 당시를 살아갔던 ‘보통 사람들’이 감내해야 했던 상황을 담아낸 것으로 봐야 한다. 실제로 <1987>의 개봉 전 이름은 <보통 사람들>로, 비슷한 영화가 개봉하는 바람에 지금의 제목으로 바뀌었다는 후일담도 있다.

‘보통 사람’ 연희는 확고한 가치기준에 따라 움직이는 다른 인물들과 달리 끊임없이 고민하는 인물이다. 올바른 것과 현실적인 것 사이를 오가며 그 누구보다도 큰 고통을 받는다. 연희가 학교 선배에게 이야기 했던 “그런다고 세상이 바뀌어요?”라는 물음은 연희, 그리고 그 당시를 살아갔던 보통 사람들이 감내해야 했을 큰 딜레마였다. 그리고 연희가 그 딜레마를 이겨내고 ‘세상을 바꾸는 일’에 동참했을 때 비로소 영화는 막을 내린다. 연희로 대표되는 보통 사람들이 불의를 몰아내고 정의를 갈구할 때가 돼서야 비로소 진정한 변화가 시작되었다는 뜻이다. 그런 부분에서 극 중 연희 이름의 연(衍)이 아닌 연(聯)이나 연(連)이 되어야 옳다. 서로 잇닿고 연결해야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점에서 주인공이 없는 이 영화에서 조금 더 세심히 살펴보아야 할 캐릭터다.

1987년 6월의 역사와 프랑스 혁명은 닮은 구석이 있다. 1948년 ‘2월 혁명’을 일으키며 루이 필리프 1세를 왕좌에서 끌어내린 프랑스 대중은 권력의 공백에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아들 루이 나폴레옹을 세우며, 다시금 왕정복고라는 뼈아픈 역사를 만든 바 있다. 우리 또한 6월 항쟁으로 대통령 직선제가 시행됐지만, 지난 권력의 실세가 대통령이 되는 어처구니없는 역사를 목도한 바 있다. 그런 점에서 역사를 읽는 기본자세는 오답노트를 꼼꼼히 살펴보는 학생의 자세가 되어야 할 것이다.

영화 <1987>을 읽는 우리의 자세는 어떠해야 할까? 그날의 감정에 젖어 옛 성취를 되새겨야 할까, 2017년과의 드라마틱한 마리아주의 멋들어짐에 감탄해야 할까, 아니면 1987년의 역사가 왜 2017년에 반복되어야 했는지, 두 번의 혁명 속에서도 부족했던 것은 무엇인지 반성하고 성찰하는 자세가 필요하지 않을까. <1987>은 시민의 승리로 끝나지만, 실제 역사에서 승리를 거둔 것은 그로부터 한참이 지난 후의 일이다. 이는 2017년도 마찬가지일지도 모른다. 수많은 주체가 한데 모여 이루는 큰 흐름, 그 속에서 우리는 방향을 잃지 않고, 자세를 바로잡으며 쉼 없이 유영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계몽영화 아닌 계몽영화 영화 <1987>이 관객에게 주는 가장 중요한 메시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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