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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념 갈등과 대립을 뛰어넘는 민주시민교육

심성보 외 3명, <보이텔스바흐 합의와 민주시민교육>

독일은 정치교육의 내용과 방법을 두고 한동안 극심한 이념 갈등과 정치적 대립을 겪었다. 하지만 1976년 보이텔스바흐 합의를 통해 실질적인 민주시민교육의 기반을 마련했다. 민주주의는 학교에서부터 배워야 한다. 그러려면 좋은 정치교육이 필요하다. 우리가 보이텔스바흐 합의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글. 오지연 주무관(서울시교육청 대변인실)

민주시민과 보이텔스바흐 합의

<지금 서울교육>은 2월호에서 <백범일지>를 통해 지난했던 건국 100년을 돌아보며 아름다운 나라를 향한 비약의 100년을 꿈꿨다. 아름다운 나라는 어떤 나라인가? 헌법 제1조에 명시되어 있다. 대한민국 헌법 제1조 1항,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2항,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우리가 주인으로서 만드는 민주사회다. 아름다운 나라는 누가 만드는가? 좋은 사람이 만든다. 좋은 사람은 누구인가? 교육기본법에 명시되어 있다. 이기와 탐욕에 허우적대지 않고 약자에게 따뜻한 마음을 널리 베푸는 사람이다. 스스로 공부하고 노력해 독립적 능력을 갖추고 자아를 실현하려는 사람이다. 품격을 닦아 공동체와 함께 발전하고 이상으로 나아가려는 사람이다. 즉 민주시민이다.

우리 교육은 민주시민을 제대로 형성하지 못했다. 무엇 때문인가? 첫째는 분단의 비극에서 강요된 이념 과잉 때문이다. 자유와 평등은 양 날개지만, 극한 이념 대립으로 자유와 평등은 서로를 부정하려고만 한다. 공동체 문제 해결을 위한 토론은 갈등으로 폭발해 합의는 불가능했다. 이로 인한 비극은 길었고, 바람만 불어도 눈물이 날 만큼 아픔은 깊었다. 둘째는 입시편향 교육 때문이다. 오늘도 아이들은 등급에 매달리고 점수에 울고 웃는다. 아무리 노력해도 모두 1등급이 될 수는 없는 게임 속에 있기에 아홉 개 등급으로 구분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질문하지 못한다. 공부는 세상의 이치를 깨우치는 즐거움이 아니고 빨리 벗어나야 할 고통과 지겨움이 됐다.

밤낮없이 어디서든 각고의 의지로 한강의 기적을 만든 산업화 세대에도, 민주주의를 외치며 피 끓는 가슴으로 젊음을 희생한 민주화 세대에서도 민주주의는 활짝 피어나지 못했다. 제도만으로 부족하기 때문이다. 민주제도에서 괴물 히틀러가 나왔다. 우리는 나면서부터 깨어 있는 좋은 시민으로 하늘에서 뚝 떨어지지 않는다. 민주시민성은 형성되고 교육되어야 한다.

왜 지금 보이텔스바흐 합의인가?

무엇을 버려야 하는가? 학생은 질문에 정답만 말해야 하는 기계적 존재가 아니다. 낡고 반인권적이며, 반민주적인 주입식 교육에 대한 신념과 고정관념을 버릴 때가 됐다. 효율과 안정이라는 가치만을 앞세워 학생을 교화의 대상으로만 여기지 말아야 한다. 학생들을 특정한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삼겠다는 ‘교육의 교조주의’를 거부해야 한다. 어디에서부터 시작해야 하는가? 주체적 시민인가? 순응적 신민인가? 불법 부당한 상황에서도 ‘가만히 있으라’고 하면 ‘가만히 있어야 한다’는 교육은 민주시민을 기를 수 없다. 역사교과서 논쟁에서 진정 심각한 문제는 배우는 학생들의 시민적 주체성을 왜곡하는 데 있다. 우리 아이들을 독립적이고 비판적인 당당한 시민이자 헌법가치 실현의 주체로 길러야 한다.

참고할 적정 사례가 있는가? 독일도 우리와 같이 이념에 따른 냉전의 결과로 분단을 경험했다. 1960~70년대 자유가치 우선 보수정당과 평등가치 우선 진보정당 사이에 격렬한 정치교육 논쟁이 있었다. ‘나쁜 동독 대 좋은 서독’이라는 프레임에 따른 교육을 깨고, ‘서독 사회는 과연 좋은가?’라는 의문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이념 과잉은 건설적 대화를 파국으로 몰았다. 독일은 어떻게 해결해나갔는가? 보이텔스바흐에서 갈등 해소의 단초가 열렸다. 1976년 가을, 저명한 정치교육학자들이 보이텔스바흐에 모였다. 최소합의라도 찾자는 좌우 사이 공감대가 있었다. 그들이 모두 묵시적으로 인정한 최소합의의 결과는 세 가지로서 첫째 강압금지의 원칙, 둘째 논쟁성 재현의 원칙, 셋째 학생중심의 원칙(학습자 이익 상관성의 원칙)이었다.

강압금지의 원칙은? 교육과 교화를 구분하는 원칙이다. 교사가 자신이 원하는 견해를 학생이 받아들이도록 강제하고, 그것을 통해서 학생의 자립적인 판단 형성을 방해하는 것은 허용하지 않는다. 교화는 민주사회에서 교사가 수행해야 할 역할과 일치할 수 없으며, 학생의 성숙이라는 목표와도 일치할 수 없다. 논쟁성 재현의 원칙은? 학문과 정치에서 논쟁적인 것은 수업에서 또한 논쟁적으로 나타나야 한다. 서로 다른 입장이 무시되어 선택 가능성이 폐기되고 대안이 언급되지 않는다면, 그것이 바로 교화로 가는 길이기 때문이다. 또 특정 견해가 뒷문으로 들어오거나, 교사나 학교의 일방적인 영향력에 학생들이 오히려 속수무책이 되기 쉽다. 학생중심의 원칙은? 학생들은 특정한 정치상황과 자신의 이해관계를 분석할 수 있어야 하며, 자신의 이해관계에 비추어 정치 상황에 영향을 미칠 수 있어야 한다. 정치교육은 추상적이거나 공허한 현 제도 암기에만 머물러선 안 된다. 정치적 판단이 자신의 이익을 위한 정치적 참여 역량을 성장시킬 수 있어야 하므로 참여 역량 원칙이라고도 한다.

물론 교사가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보이텔스바흐 합의는 열려 있는 교수방법상 최소합의일 뿐이다. 교육적 책임은 아이들에게 무정부적 개인주의를 조장하는 것을 거부한다. 학교교육에서 사회적 논쟁과 관련한 학생들의 의견이 모두 재현되어야 한다는 것도 아니다. 극단적 상대주의는 민주주의를 부정하고 인권을 억압할 뿐이므로 엄정한 태도가 필요하다. 이 세 가지 원칙을 바탕으로 한 보이텔스바흐 합의에 따라 독일 교사들은 학교 밖으로는 정치활동, 시민활동을 다양하게 경험하고, 학교 안에서는 균형 있는 토론 논쟁 교육을 소화할 수 있었다. 학생들의 주체성과 존엄성을 존중하는 교육으로 제자리를 찾아간 것이다.

좋은 사람이 좋은 사회를, 좋은 교육이 좋은 사람을 만든다. 민주주의는 민주주의자를 필요로 한다. 민주주의자가 민주주의를 만든다. 자랑스러운 1987년은 민주주의를 완성하지 못했다. 촛불은 더 좋은 민주주의를 향한 새 출발이다. 우리는 학교에서부터 민주주의를 배워야 한다. 좋은 정치교육이 필요하다. 정치를 토론하지 못하는 교실의 미래는 닫힌 사회로 귀결된다. 교육이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 한다면서 정권의 입장만이 강요되거나, 교사 자신의 주관 또는 방관만이 학교를 전횡했다. 청소년도 교복 입은 민주시민임을 전제해야 한다. 사회적 쟁점에 대한 학생들의 관심을 자연스럽게 교실 수업과 연결해 사회 현안이나 국제 이슈까지 수업 주제로 다룰 수 있게 해야 한다. 우리도 할 수 있다.

헌법 34조 4항의 ‘교육의 정치적 중립’이라는 문구는 학교 교실에서 정치교육이 배제돼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학교교육에서 제대로 민주시민교육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의미다. 민주사회의 주인이 되는 교육을 받지 못한 학생이 어떻게 민주시민으로 성장하겠는가? 깨어 있는 민주시민만이 최후의 보루다. 여기 이 책에서 출발해 함께 만들어보자.

<보이텔스바흐 합의와 민주시민교육>

심성보, 이동기, 장은주, 케르스틴 폴 저 | 북멘토 펴냄

4차 산업혁명 시대에 필요한 인재는 자신을 둘러싼 세계에 대한 분석과 비판을 통해 길러질 수 있다. 따라서 보이텔스바흐 합의는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요구되는 교육 패러다임과도 일맥상통한다. 이 책은 민주시민교육의 바이블로 평가받는 독일 보이텔스바흐 합의를 국내 최초로 체계적으로 소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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