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속 교육

우리가 시선을 두지 않는 그곳에 아이들이 있다

미국 영화 <마이 리틀 자이언트>

<마이 리틀 자이언트>는 거인과 아이의 우정 이야기라는 틀을 통해 우리 사회의 어두운 부분 그리고 그 속에서 꿈을 찾는 아이들의 이야기를 은유적으로 묘사한 작품이다. 현실과 타협하지 않고 각자의 꿈을 이루기 위해 쉼 없이 노력하는 거인과 아이의 이야기는 우리 교육이 지향해야 할 지점과도 놀라우리만큼 닮아 있다.

글. 이중기 / 사진제공. 월트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거인은 왜 고아원 소녀와 만났을까?

부모를 잃고 고아원에서 생활하는 소피는 꿈 많은 소녀다. 하지만 정작 소피는 ‘꿈’을 잘 꾸진 못한다. 불면증에 시달리기 때문이다. 고아원 원장님의 말로는 자정이 넘은 시각, 고아원 친구들의 말로는 새벽 2~3시면 나타난다는 귀신이 있다는 이야기에 소피는 오늘도 쉽게 잠을 이루지 못한다. 소피는 겁 없는 소녀이기도 하다. 오늘 밤엔 기필코 귀신의 정체를 알아내야겠다는 각오로 밤잠을 설친다. 귀신이 나타난다는 새벽 2시경, 소피 앞에 나타난 건 귀신이 아니라 키가 7m에 이르는 거인이었다.

현대 런던 시내를 난쟁이도 아닌 거인이 몰래 뛰어다니고 있다면? 쉽게 믿기 힘든 이야기다. 런던은 세계에서 CCTV가 가장 많은 도시이고, 사람들은 모두 고성능 카메라가 달린 스마트폰을 하나씩은 들고 있다. 세계 그 어느 곳보다 ‘눈’이 많은 이곳에서 거인은 어떻게 활동할 수 있는 걸까? 거인의 활동 방법은 간단하다. 사람들이 들여다보지 않는 곳, 어두운 곳, 관심 두지 않는 곳에 잠시 몸을 숨기면 되기 때문이다. 7m가 넘는 덩치를 가지고 있음에도 매일 밤 거인이 런던 시내를 활보하고 다닐 수 있었던 까닭은 바로 사람들의 편향된 ‘시선’에 있었던 셈이다.

소피가 거인과 함께 떠난 ‘거인의 세계’는 이러한 사회의 암부를 상징한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가 막상 잘 와 닿지 않을 수도 있겠다. 거인의 세계는 스코틀랜드 하이랜드처럼 멋진 풍경을 자랑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곳은 소피에게도, 소피를 데려간 거인(이하 거인 아저씨)에게도 그리 썩 좋은 환경은 되지 못한다. 거인 아저씨는 거인치고 매우 왜소한 편이었고, 거인의 세계에서 따돌림을 당하고 있었다. 특히 ‘인간콩(인간을 부르는 거인어)’을 잡아먹지 않는다는 이유로 거인 아저씨는 공동체 내에서 배척받는 신세나 마찬가지로 살고 있었다.

그러나 거인 아저씨와 소피는 그 속에서 나름의 꿈을 키워간다. 여기서 ‘꿈’은 눈에 보이지 않는 무형의 것이 아니다. 거인 아저씨의 취미는 거인의 세계에서만 잡을 수 있는 ‘꿈’을 채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소피와 거인 아저씨는 꿈을 채집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지만, 이내 다른 거인들의 습격을 받게 되고 이에 소피가 영국 여왕에게 도움을 청하는 재치를 발휘, 위기를 무사히 뛰어넘게 된다.

거인과 아이는 세상을 어떻게 바꿨나?

사회의 암부를 상징하는 거인의 세계에도 꿈이 있고, 그 꿈을 캐는 이들이 있다. 소피와 거인 아저씨는 진흙탕 속에서 피어난 연꽃의 작은 새싹처럼 위태롭다. 이는 우리 사회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는 모습이다. 사회의 어두운 부분에 쉽게 노출될 수 있는 환경, 그 속에서 자라나는 아이들, 교육의 기회를 제공받지만 엄연하게 다른 출발선으로 인해 벌어지는 격차, 더 나아질 수 없는 환경. 이 모든 것들은 ‘현실’이라는 이름으로 아이들을 옭아매고, 잘못된 선택을 ‘현실’이라는 단어로 애써 위안하면서 점점 걷잡을 수 없는 길을 걷곤 한다.

그 심연 같은 환경 속에서도 꿈은 있다. 거인 아저씨를 따라 꿈을 잡으러 간 소피는 재미있게 움직이는 빨간색 꿈을 발견한다. 이윽고 그 꿈을 잡은 소피를 본 거인 아저씨는 그 꿈을 자신에게 달라 말한다. 이유인즉, ‘너 때문에 이렇게 됐어’라는 비참한 말을 듣는 악몽과도 같은 꿈이기 때문이다. 소피는 잠시 머뭇거린다. 어렵게 잡아낸 꿈이다. 하지만 거인 아저씨의 말을 믿고 그 악몽을 건넨다. 그리고 소피는 다시금 자신의 꿈을 찾아 나선다.

현실에서 많은 아이가 악몽을 자신의 꿈으로 착각하거나, 알고 있음에도 애써 외면하는 태도를 가진다. 이런 현실에 비추어보면 소피와 거인 아저씨의 관계는 이상적으로 보인다. 어려운 환경에서도 아이의 꿈을 이뤄주려는 기성세대, 온갖 어려움이 있지만 꿋꿋이 자신의 꿈을 향해 나아가는 아이. 아귀가 딱딱 들어맞는 작품 속 환경은 ‘디즈니’의 여타 영화들과 큰 차이가 없는 ‘디즈니식 접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이 가치 있는 까닭은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잃지 말아야 할 용기, 어려운 환경을 이겨낼 수 있도록 돕는 사회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되풀이하지 않도록 반성하는 깨인 의식 등을 오롯이 담고 있기 때문이다.

사회의 어두운 부분에 ‘시선’ 두기

소피가 도움을 청하는 상대는 다름 아닌 영국 여왕이다. 왜 굳이 영국 여왕이어야 했을까? 영국 여왕은 바로 국가, 제도, 사회를 상징하는 메타포다. 사회가 발 벗고 나설 때 진정한 변화가 생긴다는 것을 원작가도 영화감독도 보여주고 있었던 것이다. 이 영화에서 가장 아찔한 장면은 소피와 여왕이 처음 만나는 장면이다. 난데없이 침실 창틀에 나타난 소피의 이야기에 여왕은 잠시 입을 굳게 다문다. 관객들은 마음 졸인다. 소피가 이야기하는 내용이 다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황당하게 들릴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왕은 소피의 말을 경청한 후 즉시 문제를 해소할 수 있는 명령을 내린다. 현실에선 일처리가 이렇게 매끄럽기 힘들다. 하지만 지향점 자체는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과 한 치도 다르지 않다.

작품 내내 반복되는 상징 중 하나는 소피의 맨발이다. 소피는 잠옷 차림으로 거인 아저씨와 모험을 떠난다. 소피의 맨발은 가난한 자를 상징하는 묘사임과 동시에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느끼는 아이들의 큰 여백이 남겨진 도화지와 같은 세계관을 상징한다. 있는 그대로를 발바닥을 통해 느끼고, 이를 통해 자신의 세계관을 구축해나가는 소피의 모습은 현실에서 아이들이 성장하는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흙탕물에 발을 담그더라도 발을 씻어내면 그만이다. 날카로운 자갈길을 걸어야 한다면 잠시 두툼한 밑창의 신발을 신는 것도 방법이다. 아이들에게 주어지는 환경은 어느 하나 똑같은 것이 없다. 제각기 주어진 환경과 사정이 다른 게 당연하다. 그 속에서 일체화된 단 하나의 정답을 찾는 건 부질없다. 더욱 세심하게 그리고 오랫동안 아이들의 세계를 바라보고 함께 고민하고 더 나아지기 위한 노력을 해나가면 그만이다. 물론 실천은 쉽지 않다. 그렇다면 지금 당장 해야 할 것은 ‘어두운 곳에 시선 두기’다. 그 속에서 살고 있는 아이들을 바라보기다. 어려운 실천은 그 다음부터 가능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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