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속 교육

울타리 너머의 아이들

미국 영화 <인피니틀리 폴라 베어>와 일본 영화 <아무도 모른다>

학교라는 울타리 너머에도 아이들은 있다. 자진하여 학교 밖을 선택한 아이들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아이들도 있다. 그 아이들을 다시금 울타리 안으로 들이기 위해선 어떠한 노력이 필요할까? 미국 영화 <인피니틀리 폴라 베어>와 일본 영화 <아무도 모른다>는 이러한 불편한 문제에 시선을 둔 작품이다.

글. 이중기 / 사진제공. 루믹스미디어, 엔케이콘텐츠

어디에나 학교 밖 아이들은 있다

1970년대 미국 보스턴. 하버드대학에서 캠퍼스 커플로 만나 결혼에 성공한 매기와 캐머런은 현재 별거 중이다. 결혼 전부터 사사로운 문제를 일으켰던 캐머런의 조울증이 두 자매의 교육과 자신의 커리어에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치고 있기 때문이었다. 유복한 명문가에서 자란 캐머런은 좋은 아빠였지만, 좋은 남편은 되지 못했다. 그는 경제적으로 무능했고, 가족을 가난이라는 나락으로 떨어뜨렸다. 결혼 후 ‘경단녀’가 된 매기는 다시 취업전선으로 뛰어들기 위해 미뤄두었던 학업을 다시 시작하려 한다. 하지만 문제가 있다. 학업과 아이들 돌봄을 함께 하기엔 무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이 매기는 별거 중인 남편 캐머런에게 도움을 청한다. “이제 당신도 아버지 노릇을 할 때가 됐다”라고.

1980년대 일본 도쿄. 후쿠시마 가족은 어렵사리 새집을 빌렸다. 그것도 집주인을 속이지 않았더라면 불가능했을 일이었다. 집주인이 다자녀 가구와 이웃으로 사는 걸 그다지 달가워하지 않는 탓에 네 남매나 되는 후쿠시마 가족이 집을 빌리기란 적잖게 어려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엄마는 장남 아키라만 있다고 하며 집주인을 속였다. 나머지 아이들은 늦은 밤 몰래 들여오거나, 이삿짐 캐리어에 넣어 ‘밀반입’했다. 아이들에게 신신당부도 잊지 않는다. “아키라는 릿쿄 초등학교(실존하지 않는 초등학교로 릿쿄는 근방에 있는 대학교 이름)에 다닌다고 하자. 나머지는 모두 집 밖으로 나가면 안 된다.” 그리고 다음 날 엄마는 일 때문에 오랫동안 집을 비울 거라는 메모를 남겨두고 떠난다. 몇십만 엔의 생활비가 든 봉투만 남겨둔 채.

시대와 사회를 공유하지 않는 두 가족에게도 공통점은 있다. 두 가족의 아이들은 모두 교육의 울타리 밖에 있다. 출생신고도 제대로 하지 않아 입학통지서도 날아오지 않는 후쿠시마 가족의 네 남매, 가난에 허덕이면서도 두 자매의 재능을 안타까워하는 캐머런과 매기는 각각 ‘소외’와 ‘가난’이라는 교육에 있어 가장 큰 걸림돌들을 한 아름씩 안고 있다.

그래도 우리는 소통한다

아이들을 남편 캐머런에게 맡기기로 했지만, 내심 불안한 매기. 하지만 불량배들이 득실거리고, 배움에 대한 열의와 삶에 대한 의지가 없는 아이들만 있는 공립학교에서 아이들을 ‘탈출’시키려면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 곱씹으며 학업을 이어간다. 하지만 캐머런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자신 또한 이곳에서 나고 자란 만큼 아이들도 훌륭히 성장시킬 수 있으리라 믿었기 때문이다. 물론 마음 같아선 자연과 가까이 지낼 수 있는 교외지역에서 살고 싶지만, 그건 매기가 결사반대할 터였다.

좋은 아빠의 자질은 충분했지만, 캐머런의 조울증은 아이들 사이에 갈등을 지속해서 만들어냈다. 캐머런은 아이들에게 쉽게 화를 냈고, 자그마한 일에도 크게 소리를 질러댔다. 하지만 아이들은 전혀 기죽지 않았다. 아빠가 부조리한 이유로 화를 내면 더 크게 화를 냈고, 큰 소리를 내면 둘이 함께 소리를 질렀다.

이상적인 소통 상황은 아니다. 하지만 희망적인 부분은 캐머런의 분노가 분노로만 끝난 것이 아니라 적절하지 않은 방식이지만 소통으로 이어졌다는 사실이다. 영화에서 캐머런과 두 자매는 끊임없이 이야기를 나눈다. 결코 따스하다고 할 수 없는 날 선 말들이 오고 가지만, 대화를 통해 각자 서로의 생각을 다듬어나간다. 그렇게 너무나도 넓게 벌어져 다시는 봉합되지 않을 것 같았던 캐머런과 두 자매 간의 관계는 비 온 뒤 땅처럼 천천히 그리고 단단하게 합쳐진다.

‘미생’을 ‘완생’으로 만들 책임

극한의 상황에서 점차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는 매기와 캐머런 가족에 비해 후쿠시마 가족의 상황은 갈수록 나빠지고 있었다. 크리스마스까지 돌아오겠다던 엄마는 새해가 되어도 돌아오지 않았다. 매년 신정만 되면 세뱃돈을 받았던 동생들이 걱정된 장남 아키라는 엄마가 준 얼마 남지 않은 생활비를 동생들에게 나눠준다. 하지만 이런 생활도 조만간 끝나게 될 터다. 네 남매가 먹고 마실 식료품을 사기에도, 당장 다음 달에 집세와 수도료, 전기세, 가스비 등을 내기에도 턱없이 모자란 돈만 남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키라는 네 남매의 아빠들을 찾아 나서기로 했다. 이복 남매들인 후쿠시마 가족의 아빠들은 한결같이 냉담하다. 단돈 5000엔을 주며 “다시는 돈 달라고 하지 마라. 나도 힘들다”라고 던지는 말처럼 가시 돋거나 “아무리 생각해도 난 너희 아빠가 아니다”라는 무심한 말뿐이다. 어떠한 책임감도 느끼지 못하는 모습에 실망한 아키라는 다시는 아빠들을 찾지 않는다.

엄마 또한 일은 핑계일 뿐, 아빠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언제나 새로운 사랑을 갈구했던 엄마는 네 남매의 아빠들에 이어 또 다른 남자에게 빠져 있었다. “그 남자와 잘되기만 한다면 너희들 모두 학교에도 갈 수 있고, 제대로 된 집에서 살 수 있다”고 호언장담하는 엄마. 차남인 시게루와 막내인 유키는 그 말을 듣고 좋아하지만, 장남인 아키라와 장녀인 쿄코는 그것이 이루어질 수 없는 일임을 안다. 그 사람에게 너무 매달리지 말라는 아키라의 말에 엄마는 “엄마는 행복해지면 안 되는 거니?”라고 말하며 기어코 집을 떠나고 만다.

초등학교 고학년에 해당하는 나이였던 아키라와 쿄코의 꿈은 학교에 가고 싶다는 것. 바깥사람들에게는 초등학교에 다니고 있다고 말하지만, 아키라와 쿄코 모두 한 번에 학교에 가본 적이 없다. 홈스쿨링을 통해 부족한 학업을 채워주고 있다고 하지만 엄마가 부재한 상황에서 제대로 된 교육이 이루어질 리 만무하다.

흑백과 빈부의 격차를 넘어선 편견 걷어내기

당시 보스턴은 백인 거주 지역과 유색인종 거주 지역 간의 빈부격차 및 갈등이 큰 지역이었다. 매기와 캐머런 가족은 이러한 보스턴의 시대적 상황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부유층과 저소득층, 백인과 흑인, 무능력한 가장과 사회적 참여를 제한받는 여성 등 당시 보스턴을 비롯한 미국 사회가 끌어안고 있던 수많은 갈등은 매기와 캐머런 가족에게 오롯이 내포되어 있었다. 이는 두 자매의 피부 색깔에서도 여지없이 드러난다.

예컨대 일반적으로 백인과 흑인 사이의 자녀는 흑인의 외형을 더 강하게 가지고 태어난다. 하지만 두 자매 중 첫딸인 페이스는 누가 보아도 전형적인 백인의 모습을 하고 있다. 당시 사회 분위기상 백인의 외모를 가지면 좋아할 성싶은데, 페이스는 그렇지 않은 모양이다. “엄마 나는 흑인이 아닌가 봐”라며 걱정하는 페이스의 모습은 가족 간의 끈끈한 유대를 은유한다. 결코 낙관적인 상황이 아님에도 매기와 캐머런 가족이 붕괴하지 않고 이어가는 까닭은 바로 이런 유대를 원천으로 한다.

유대는 튕겨나갈 것 같은 가족들을 하나로 모으는 원심력이다. 이 때문에 매기와 캐머런 가족은 좋지 않은 내외적 환경 속에서도 결코 무너지지 않는다. 매기와 캐머런 가족의 유대는 어디서부터 시작됐을까? 그리고 가족 구성원 간의 사랑은 어떻게 유지될 수 있었을까? 감독은 그 까닭을 타인을 바라보는 넓은 견지에서 찾는다. 타인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자신만의 프레임에 맞춰 해석하지 않는 것. 매기와 캐머런 가족의 공통된 미덕은 서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구성원 누구 하나 빠짐없이 공존의 길을 함께 고민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캐머런은 가족과 잠시 떨어지더라도 더 나은 삶으로의 변화를 원하는 매기의 고민을, 아이들은 시끄러운 도시가 아닌 자연과 인간이 조화된 보스턴에서의 삶을 바라는 캐머런의 바람을, 매기는 가족이 언제나 화합하길 바라는 아이들의 꿈을 외면하지 않는다.

이를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예는 동네 아이들과 농구하는 장면이다. 근처 공립 초등학교를 함께 다니는 동네 아이들이 농구하는 모습을 페이스와 아멜리아는 못 본 척 지나친다. 캐머런은 “같이 농구하자고 해보자”라고 권유하지만 “쟤네들은 나쁜 애들이에요”라면서 캐머런의 제의를 거절하는 아이들. 여기에 캐머런의 대답이 무척 재미있다. “방울 달린 모자를 쓰는 애가 나빠 봤자지”라면서 아이들의 손을 잡고 농구 코트 안으로 들어온다. 주뼛거리던 아이들은 이내 동네 아이들과 어울리기 시작한다. 캐머런의 말마따나 나쁜 아이들이 아니었던 것. 그릇된 편견과 지레짐작을 걷어내는 일은 자칫 어려워 보이지만 그 무엇보다 쉽다는 새삼스러운 명제를 아이들은 경험으로 체득하며 변화해나간다.

내 삶 속 학교 밖 아이들

돈이 모두 떨어져 전기도, 가스도, 수도도 모두 끊긴 후쿠시마네 집. 겨우내를 버티고 찾아온 여름은 남겨진 아이들에게 더욱 가혹하게 다가온다. 인근 공원에서 물을 떠 오고, 음식은 편의점에서 유통기한 지난 음식을 받아 해결하는 아이들. 교육의 문제보다 생존의 문제가 더욱 시급하게 됐다. 그사이 장남 아키라는 친구 여럿을 사귀었다. 첫째는 왕따를 당하고 있던 여학생 사키.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배회하던 사키는 아키라와 동생들을 만나 이내 친해진다. 빈 컵라면 용기에 잡초 씨앗을 가져와 잡초를 화분에 키우는 사키와 후쿠시마 가족. 늘 보던 것들이지만 누구도 관심을 주지 않는 잡초처럼, 그 누구의 보살핌을 받지 않음에도 후쿠시마 가족과 사키는 조금씩 성장해나간다.

사키처럼 서로에게 의지가 되는 친구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친구들도 있다. 오락실에서 만난 아키라의 남학생 친구들은 이내 후쿠시마의 집을 자신들만의 아지트로 만들어버린다. 아키라는 내심 친구들이 집에 오는 게 좋아 없는 살림에도 꾸준히 신규 게임을 구입해왔었다. 겨울이 끝나고 중학교에 입학한 친구들은 더는 아키라의 집에 가지 않는다. 친구들을 찾아 교문 앞에서 기다렸다가 새로운 게임을 샀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여전히 같은 자리에 머물러 있는 아키라와 달리 친구들은 중학생이 되어버린 간극을 이겨내지 못한다.

아키라가 잠시 자리를 비운 어느 날. 막내 유키가 의자 위에 올라갔다가 떨어져 그만 사망하고 만다. 아키라는 사키와 함께 유키가 평소 타고 싶었던 비행기를 실컷 볼 수 있도록 유키를 나리타 공항 근처에 묻는다. 밤새 유키를 묻어주고 흙투성이가 된 채 지하철을 타고 돌아오는 아키라와 사키의 얼굴엔 슬픔이나 분노와 같은 것들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다. 슬픔이나 분노 같은 감정도 내일이 있을 때나 일어난다. 당장 내일의 삶을 담보할 수 없는 아이들은 슬픔이나 분노마저 잃어버렸다.

이렇게 서로 다른 두 가족에도 교집합은 있다. 가족이 지닌 문제가 교육과 밀접한 관련이 있지만, 교육으론 해결할 수 없다는 점이다. 매기와 캐머런 가족은 자신들의 문제를 정확히 직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에 대한 올바른 해결책을 내놓았다. 서로가 다름을 인지하고 쉼 없는 소통을 이어가는 것. 여전히 날 선 말들이 오가지만 서로에 대한 사랑은 굳건하다는 사실을 공유하는 것.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캐머런은 페이스와 아멜리아에게 자신도 친구 집에 데려가 달라고 조른다. 하지만 매몰차게 거절하는 페이스와 아멜리아. 애원하는 눈빛을 보내는 캐머런에게 페이스는 “(우리 뒷모습을)쳐다보게 하지 말아요! 미안해지잖아요!”라고 말한다.

서로 사랑의 방식이 다르다는 걸 알게 된 이들 가족에게 새로 피어날 갈등이나 문제도 이젠 걱정할 필요가 없을 성싶다. 가족들을 뿔뿔이 흩어지게 할 뻔한 사립학교 진학 문제도 가족이 하나로 뭉쳐지며 자연스레 사라졌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 영화에 더욱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주인공은 페이스와 똑같은 유년시절을 보낸 감독 자신이다. 자신의 자전적인 내용을 영화로 옮긴 감독 마야 포브스는 자신의 가족사를 통해 어떠한 어려운 경우에도 가족은 버텨내고 다시금 응집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아무도 모른다> 속 후쿠시마 가족도 실화를 바탕으로 한다. 영화는 1988년 일본을 충격에 빠지게 한 ‘스가모 아동 방치 사건’을 모티브로 했다. 영화 속 내용과 유사하게 아빠들은 아이들을 위한 최소한의 의무도 다하지 않았고, 엄마는 아이들을 작은 임대 맨션에 몰아넣고 장남을 제외하고는 외출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드물게 생활비를 보내긴 했지만, 막내는 물론 영화에는 등장하지 않았던 삼남마저 사망한 끔찍한 사건이었다.

학교라는 울타리 밖 아이들은 영화나 드라마 속에서 등장하는 특별한 존재가 아니다. 다른 집에서 태어났다면 충분히 사랑받고 누구나 똑같이 누려야 할 교육을 받으며 자신의 삶을 스스로 선택해 살아가는 권리가 주어졌을 아이들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주어지는 교육제도 틀 밖의 아이들 문제에 대해 두 영화는 서로 다른 시선을 제시한다. <인피니틀리 폴라 베어>에서처럼 문제해결의 열쇠는 가족 스스로가 쥐고 있다는 점, <아무도 모른다>에서처럼 사회의 지속적인 관심과 문제 해결을 위한 거시적 노력이 필요하다는 점이 그렇다.

“고개를 돌리면 언제나 아빠가 그 자리에 있어줬어”라는 페이스의 대사는 서로 다른 시대와 상황을 묘사한 두 영화를 관통하는 핵심적인 메시지다. 학교 밖 아이들은 우리 삶과 이격되어 꼭꼭 숨겨진 존재가 아니다. 방학은 학교 밖 아이들이 자칫 더 적은 관심을 받게 될 수 있는 시기다. 지금이야말로 발걸음을 멈추고 그들의 삶을 찬찬히 살펴볼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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