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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여자가 꿈꾸었던 지옥 너머 봄날의 기록

조선희, <세 여자>

우리는 여성혁명가로 로자 룩셈부르크를 앞세운다. 그러나 그녀보다 더 치열하게 살았던 우리나라 여성혁명가들에 대해서는 거의 모른다. 유관순 열사를 누나라는 호칭으로 부를 뿐이다. 우리 역사에 여성혁명가가 없었을까? 냉전 사고와 이념적 금기에 묶여 독립운동의 7할 이상을 은폐한 결과일 뿐이다.

글. 권종현(우신중학교 교사)

세상을 바꾸고자 했던 세 여자

식민과 분단 고착화 시기, 반제국주의 사회주의 페미니즘의 용광로 속에서 꽃잎처럼 여렸지만 강철보다 단단했고, 시베리아 칼바람 아래서도 불꽃보다 뜨거웠던 사람들. 1901년생 주세죽, 1902년생 허정숙, 1903년생 고명자. <세 여자>는 얼음보다 차갑게 굳어버리고, 쇳물보다 뜨겁게 녹아 흘러야 했던 세 여자의 이야기다.

20세기 초엽, 세계는 제국주의가 정점을 찍고 있었다. 가혹한 식민통치와 수탈 경쟁을 일삼고, 한쪽에서는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나 기세를 떨치고, 또 다른 곳에서는 자본주의의 모순이 대공황으로 곪아 터지고, 신구 제국주의 국가들은 제1·2차 세계대전을 일으켜 난투극을 벌였다. 역사의 소용돌이 한복판에서 태어난 세 여자는 제국주의 식민지배, 계급적 수탈, 여성에게 가해지는 관습과 편견의 억압과 차별을 모두 겪었다. 대개는 세상에 순종하고 운명에 굴복해야 했다.

그러나 어떤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인간에게 가해지는 모든 억압과 차별을 거부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점에서 인간은 위대하다. 결코 적지 않은 사람들이 적당히 순응하면 구할 수 있었던 최소의 안락과 생존을 거부했다. 그리고 민족의 자주와 독립, 호혜와 평등, 인류 공영과 평화의 길을 찾아 고난의 길을 스스로 걸었다.

그 길 위에 희망과 환희의 순간은 과연 얼마나 있었겠는가. 투옥과 고문, 의심과 배반, 회의와 절망, 추위와 배고픔, 잡을 지푸라기 하나 없는 광막한 우주 공간의 절대 고독. 독립운동가, 게다가 사회주의 혁명가, 더구나 사회주의 무장투쟁 독립혁명가, 특히 여성 사회주의 무장투쟁 독립혁명가라면, 싸워야 했던 고난의 폭은 넓고 견뎌야 했던 고독의 깊이는 아득했으리라.

세 여자는 1920년대 초기 조선공산당 창당 멤버이자 사회주의 독립혁명가다. 고명자는 한국전쟁이 나던 1950년에 죽었으나 어떻게 죽었는지 기록이 확실하지 않다. 주세죽은 독립혁명 과정에서 모스크바까지 밀려 들어갔다. 그러나 스탈린 정치 숙청 과정 중 남편 김단야가 일제 밀정의 누명을 쓰고 죽은 후 카자흐스탄 크질오르다에서 유형을 살다가 죽었다. 허정숙은 연안에서 항일투쟁을 했고 태항산 전투와 북한 정권 수립에 참여했다. 연안파가 대거 숙청되는 가운데에도 허정숙은 건재했고 1991년 죽을 때까지 고위직을 맡거나 그에 상응하는 대우를 받았다. 세 여자의 죽음은 서로 달랐다. 그러나 이상과 사랑을 향해 쏟았던 열정, 그리고 감수했던 고뇌와 고독의 깊이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한반도의 역사 전환기에서 세 여자를 조명하다

이 책은 은폐한 독립운동 세력 중 하나인 연안 쪽에서 활동했던 조선의용군 세력을 비교적 자세히 그렸다는 데서도 큰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우리 민족의 독립투쟁은 거칠게 셋으로 분류할 수 있다. 상해 임시정부 세력, 의열단 및 조선의용군 세력, 동북항일연군 세력이다. 앞서 말했듯 거친 분류다. 아나키스트(무정부주의) 세력도 있고, 미국에서 청원운동을 한 사람들도 있으며, 국내에서 제한된 활동을 하거나 지하에 숨어 틈새를 노리던 사람들도 있었다. 그리고 각 세력은 서로 넘나들기도 했다.

대한민국은 상해 임시정부 세력을 정통으로 본다. 그러나 이명박과 박근혜 시대에는 이조차 지키기가 어려웠다. 그들은 임시정부 세력조차 대한민국 ‘건국’에 공헌한 바가 없다며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 오히려 친일근대화 세력을 대한민국 근대화의 기원으로 자리매김하려 했다. 근대화라는 면에서 상통하기에 가능한 논리였다. 역사교과서 국정화 시도는 이런 흐름의 일환이었다.

이에 비해 동북항일연군 세력은 북쪽에서 조선인민공화국을 세웠다. 물론 정부수립 과정에는 남로당파, 소련파, 연안파, 국내파까지 참여했다. 그러나 한국전쟁 후 김일성 권력 공고화 과정에서 대부분 숙청되었다. 우리는 그 과정에 대한 자료 접근이 쉽지 않아 자세한 내막을 알지 못한다. 김일성이 1인 독재화 과정에서 정치적 숙청을 단행한 것으로 볼 뿐이다.

사정이 이러하니 우리는 동북항일투쟁에 대해서는 거의 무지하다. 알려고 하면 다쳤다. 우리 마음속에 종북 세력이라는 오해를 받지 않으려는 심리가 어느 틈에 굳건하게 똬리를 틀었다. 의열단과 조선의용대 그리고 조선의용군에 대해서는 아주 조금 알려졌다. 그나마 최근 김원봉을 소재로 한 영화 <암살> 덕분이다. 김원봉이 최고의 무장 독립투쟁가인 듯 잘못 알려지기도 했지만 어쨌든 연안 세력도 독립투쟁사에 이름이 오르내린 것만으로도 70여 년 만에 일어난 큰 변화다. 이제 대결과 냉전의 시대를 건너 이념의 편견을 벗고 역사와 사회를 읽을 수 있는 시대가 다가온다. 은폐도 축소도 그리고 선전·선동을 위한 과장도 없는 엄정한 역사 연구 자세가 절실하다.

작년 여름 중앙아시아를 여행했다. 카자흐스탄은 1937년 고려인들이 스탈린의 강제 이주 정책에 의해 초기에 정착했던 곳이다. 옛 수도 알마티에서 몇 시간 동안 북쪽으로 달리면 강제 이주 고려인 1진이 도착했던 우슈토베 역이 나온다. 그 근처 바슈토베 언덕에는 고려인들의 공동묘지가 있었다. 지금부터 80여 년 전, 한겨울 사막과 같은 황무지 벌판에 버려졌을 그들의 고난이 가슴에 사무치게 다가왔다.

그곳을 안내한 가이드는 고려인 4세 한 나탈리아 양이었다. 그의 증조할아버지와 가족들은 모스크바에서 왔다고 했다. 그녀는 우리 일행이 위령비 앞에서 절을 하고 묵념을 하는 동안 눈물을 하염없이 쏟았다. 당시 모스크바에서 이곳 알마티 근처로 왔다면 그녀 가족의 사연은 주인공 김단야, 주세죽 부부와 비슷했을지 모른다. 나는 주세죽이라는 인물을 가장 몰입하면서 읽었다. 읽는 동안 계속 나탈리아의 모습이 겹쳤다. 세 여자의 발자취는 지금도 유라시아 대륙 곳곳에 남아 서로 다른 일상을 살고 있다.

바야흐로 한반도의 역사 전환기다. 정전 체제는 영토만 가른 것이 아니었다. 가족과 공동체, 인식과 사고, 역사와 문학, 꿈과 희망도 갈랐다. 65년 정전 체제를 평화 체제로 전환하는 시대에 우리는 아직도 갈 길이 멀다. 그러나 이제 지난 120년 역사의 질곡을 벗어날 때가 되었다. 이 소설을 읽고 나누는 것도 평화로운 세상을 향해가는 한걸음이 될 것이다.

<세 여자>

조선희 저 | 한겨레출판사 펴냄

조선희 작가는 <세 여자>에서 그동안 한 번도 제대로 조명되지 않았던 세 명의 여성 혁명가, 그들의 존재를 담담히 보여준다. 세 여자가 살다 간 시대적 배경이 말해주듯 이 여성들을 중심으로 주변 남자들의 인생과 함께 1920년대에서 1950년대에 걸쳐 한국 공산주의 운동사를 폭넓게 다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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