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교육 에세이

빌어먹는 삶

건강한 삶이란 어떤 모습인가?

동굴 속에서 무리를 이루며 살던 때부터 인공지능이 등장한 현재까지 인간생존에 있어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문제는 ‘먹고사는 문제’다. 기술과 사회가 눈부신 발전을 거듭했음에도 우리는 예나 지금이나 ‘먹고사는 문제’를 고민한다. 무엇이 문제일까? 삶의 방식과 태도를 바꿔야 한다. 그렇다면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

글. 김현철(서울시교육청 대변인)

벌어먹던 시절의 종말

요즘 먹고사는 게 힘들다는 얘기를 많이 듣는다. 취업 준비 중인 대학생들도 그렇고 자영업자들이나 회사원들도 먹고사는 게 힘들다고 이구동성이다. 각자의 성장배경이나 학력 그리고 꿈에 상관없이 이 ‘먹고사는 문제’는 우리 모두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이며, 또 모든 판단과 결정의 기준으로 작동하고 있다.

먹고사는 문제는 인간생존의 가장 기본적인 일로 사실 수백만 년 전 동굴 속에서 집단생활을 하던 초기 인류도 똑같은 고민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즉 인류는 이 ‘먹고사는 문제’를 수백만 년 동안 계속해오고 있는 것이다. 근대산업화를 통한 대량생산과 대량소비의 시대를 거치면서 소위 생존에 필요한 물질적 생산력은 확보됐다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시간이 가면 갈수록 오히려 먹고사는 문제는 점점 더 절실해지고 있다.

왜 그럴까? 뭐가 문제일까? 분배의 문제? 하지만 더 근본적으로 보면 우리는 이 ‘먹고사는 문제’를 벌어먹는 것을 통해 해결하고자 하기 때문이 아닐까? 지난 역사를 돌이켜 보더라도 우리 인류는 자연으로부터 벌어먹고, 도구를 통해 벌어먹는 것을 유일한 자구책으로 생각하며 살아왔다. 하지만 이 벌어먹는 자구책과 생존법은 유한한 자연을 대상으로 하기에 이미 그 한계에 다다른 상황이다. 최근 지구온난화를 비롯한 자연재해의 급증은 이런 벌어먹는 삶이 더는 유효하지 않다는 자연의 경고, 지구의 최후통첩은 아닐까.

지금 유행처럼 떠돌고 있는 제4차 산업혁명의 흐름은 다른 한편으로 사람이 온전히 사람의 일로만 먹고살아야 하는 시절이 도래했음을 의미한다. 기계는 인간이 발명한 것이지만, 자식이 커서 품을 떠나면 스스로 커야 하듯이 기계 역시 이제 인공지능의 등장과 더불어 제 갈 길을 가게 되었다. 이제 기계는 기계의 일을 알아서 할 것이다. 다시 말해 사람이 도구에 종속되어야 하는 상황은 앞으로 더는 벌어지지 않는다. 문제는 사람이다. 이제 드디어 사람은 사람의 일을 해야만 한다. 기계를 통해 도구를 통해 벌어먹던 시절이 끝났다는 말이다. 여기에 우리 모두의 존재론적인 고민과 상상력이 필요한 것이다.

빌어먹는 삶 = 소통하는 삶

사람들은 보통 구해서 먹고 벌어서 먹을 생각만 했지, 빌어먹을 생각은 하지 않는다. 빌어먹는다고 하면 거지냐고 묻는다. 사지육신이 멀쩡한데 왜 빌어먹느냐고 자존심도 없느냐고 반문한다. 하지만 진짜 삶이란 빌어먹는 것이다. 얻고 구해서 벌어서 먹는 것이 아니라 빌어서 먹는 것이 삶의 진짜 모습이다. 빌어먹는 것은 구걸하는 것이 아니다. 서로 부대끼고 의지해서, 서로 조건 짓고 조건 받으면서, 사회적 관계와 역사적 관계 속에서 서로 관계하면서 사는 것이다. 상호연관 속에서 작용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야말로 건강한 삶의 모습이다. 빌어먹는 삶이 소통하는 삶이며 빌어먹게 만드는 것이 바로 일이다. 빌어먹지 못하는 것은 일이 아니다.

현실의 우리들의 모습을 보자. 먹고산다는 핑계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하나라도 더 벌어서 켜켜이 쌓아두고 그것도 모자라 남의 것을 빼앗고 훼방 놓는다. 남의 고통과 어려움은 안중에 없고 오직 자신만의 튼튼한 성(城)을 높게 쌓아 올릴 궁리만 한다. 이것은 건강한 삶의 모습이 아닐뿐더러 때로는 자신을 위태롭게 만들기까지 한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최고로 안전한 선택이란 바로 상대방을 인정하고 책임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안전과 보안, 안보를 크게 보면 평화라고 부를 수 있다. 결국 평화란 군비를 늘려서 우리 집 담장을 높게 쌓는다고 오는 것이 아니라 담장을 없애고 이웃을 인정하고 존중할 때 나아가 이웃의 고통과 아픔을 해결하고 책임질 때 비로소 나타나는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나의 안전과 평화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세상이 필요로 하는 ‘나’

우리는 보통 ‘나’가 있으니 이에 합당한 조건을 갖추어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즉, 나란 존재가 있으니까 이에 맞는 관계를 찾고 영향을 주고받고 삶을 영위한다고 여긴다. 하지만 존재가 있기 때문에 그 결과로서 삶을 고민한다면 존재의 이유, 존재의 발생원인에 대해서는 답하기가 곤란해진다. 우리의 삶이, 내가 하는 일들이 어쨌든 내가 존재하기 때문에 발생한 것일까? 존재와 객관세계의 관계에서 존재가 우선하는 것일까? 객관세계의 구체적 필요에 의해 존재가 주어지는 것은 아닐까?

불교용어에 탁발(托鉢)이란 말이 있다. 승려들의 생활방식이자 수행방식으로, 출가수행자가 무소유계를 실천하기 위해서 음식을 얻어먹는 것을 말하며, 단순한 구걸이 아니라 아집(我執)과 아만(我慢)을 없애고, 무욕과 무소유를 실천하고자 하는 것을 말한다. 자연에 의지해서 인간과 인간들 관계에 의지해서 자신의 몸과 마음을 욕망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바로 탁발의 정신이고 빌어먹는 삶이다. 보편적 상호연관 속에서 치열하고 건강한 삶의 방식인 것이다.

태어날 때부터 부모의 몸을 빌려 태어난 인간이 숨 쉬고 먹고 마시고 생각하고 움직이는 일체의 모든 행위를 인간관계, 자연관계, 사회관계에 의지하지 않은 채 도대체 무엇을 한단 말인가? 이런 점에서 빌어먹는 삶은 구걸이 아니라 그야말로 무소유의 삶 자체, 욕망과 아집을 훌훌 털고 정말로 자유로운 삶의 방식을 말한다. 나 자신의 욕망과 자아실현이라는 속박으로부터 스스로를 해방시키는 치열하고 건강한 삶의 모습이 바로 빌어먹기인 것이다. 그런데도 빌어먹기를 주저하고 두려워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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