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획 지난 100년을 돌아보며 새로운 100년을 그리다

한번의 젊음, 어떻게 살 것인가

대한민국 독립운동가 10인의 삶 돌아보기

조국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친 독립운동가들에게 “한 번뿐인 젊음을 어떻게 살 것인가”라고 묻는다면 그들은 어떻게 답했을까? “일생으로 답했다”라고 하지 않을까? 대한민국 독립운동가 10인의 이야기를 통해 ‘한 번의 젊음,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답을 찾아보자.

글. 최태성(별별 한국사 연구소장) / 일러스트 제공. 대한결핵협회

조국의 독립을 향한 간절함, 김구

김구는 조국을 위해 평생을 바친 정치가이자 독립운동가다. 3·1 운동을 계기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조직에 참여했다. 김구는 침체된 임시정부의 활력을 되찾고자 한인애국단을 결성하여 이봉창, 윤봉길 등의 의거를 지휘했다. 그리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이 된 후 한국광복군을 조직하여 대일 항쟁을 이끌었다.

“네 소원이 무엇이냐 하고 하느님께서 물으신다면, 나는 서슴지 않고 ‘내 소원은 오직 대한독립이오’ 하고 대답할 것이다.” 김구는 조국 독립에 대한 간절함을 이렇게 표현한다.

1945년 8월 15일 드디어 우리 민족이 그토록 바라던 광복이 찾아왔다. 하지만 김구는 마냥 기뻐할 수가 없었다. 광복과 함께 분단이라는 상황에 놓이게 됐기 때문이다. 김구는 분단이라는 암울한 상황을 막기 위해 남북한 통일 정부 수립을 위해 노력한다. 그러나 그의 뜻은 이루어지지 못했고 안두희에게 암살당하고 만다.

김구는 항상 독립하여 정부가 생기면 그 집의 뜰을 쓸고 유리창 닦는 일을 해보고 죽게 해달라고 항상 기도할 정도로 독립을 염원했으며 그것을 이루기 위해 평생을 바쳤다. 대한민국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가? 공기와도 같이 그저 늘 존재하는 그런 나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누군가에게는 온 삶을 다 바쳐서 지키고 싶었던 나라였음을 기억해주기 바란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조국을 택한 윤봉길

윤봉길은 김구가 조직한 한인애국단에 들어가 상해 훙커우 공원에서 일왕 생일을 기념하는 행사장에 폭탄을 투척해 일본군의 주요 인물들을 살상했다. 윤봉길의 의거는 침체기를 맞고 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독립운동 세력에 힘을 불어넣었다. 하지만 윤봉길은 곧바로 체포되어 사형을 선고받고 순국했다.

윤봉길에게는 어린 두 아들이 있었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돌아오지 못할 길을 떠나면서 그는 아들들에게 편지를 남겼다.

강보에 싸인 두 병정에게 - 두 아들 모순(模淳)과 담(淡)에게
너희도 만일 피가 있고 뼈가 있다면
반드시 조선을 위해 용감한 투사가 되어라.
태극의 깃발을 높이 드날리고
나의 빈 무덤 앞에 찾아와 한잔 술을 부어놓으라.
그리고 너희들은 아비 없음을 슬퍼하지 말아라.

윤봉길은 편지에서 담담하게 두 아들에게 아비 없음을 슬퍼하지 말라고 했지만, 아마도 엄청난 슬픔을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윤봉길은 ‘나와 내 가족의 미래보다 조국을, 백 년을 살기보다 조국의 영광을 지키는 기회’를 선택했다.

태어날 때부터 독립운동가였던 사람이 있을까?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쳤던 수많은 독립운동가 역시 가족들과 즐겁게 오래오래 살고 싶었을 것이다. 그것이 인지상정이다. 하지만 윤봉길은 그 인지상정을 포기하고 조국을 선택했다. 누군가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지켜내고자 했던 곳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대한민국이다.

결코 평범하지 않은 애국심, 이봉창

이봉창은 그저 술 마시고 놀기 좋아했던 지극히 평범한 젊은이였다. 이봉창은 어릴 때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인의 양자로 들어갔다. 일본인의 이름을 쓰고 일본인처럼 행동했으나 조선인 이봉창의 처지가 바뀌는 것은 없었다. 그래서 새로운 삶을 위해 상해로 건너갔다.

그러나 이봉창의 가슴속에는 조선인이어서 일본 사회에서 당해야 했던 수모가 깊이 새겨져 있었다. 이후 김구를 만나 한인애국단의 제1호 단원이 됐고, 신년 관병식에 참석하고 돌아가던 히로히토 일왕에게 수류탄을 던졌다. 이 일로 체포된 후 이치가야 형무소에서 순국했다. 이봉창의 의거는 비록 실패했으나, 이 의거를 계기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항일 투쟁은 본격화됐다.

의거를 치르기 전 이봉창은 김구에게 이런 말을 남겼다.

“제 나이 이제 서른하나입니다. 앞으로 서른한 해를 더 산다 해도 지금보다 더 나은 재미가 없을 것입니다. 인생의 목적이 쾌락이라면 지난 31년 동안 쾌락이란 것을 모두 맛봤습니다. 이제부터 영원한 쾌락을 위해 목숨을 바칠 겁니다.”

그리고 그는 웃으며 폭탄을 쥐고 마지막 사진 한 장을 찍었다.

이봉창은 일제강점기를 살았던 정말 평범한 이웃집 삼촌이었다. 그렇기에 그 모습은 우리에게 더 친근하게 다가온다. 그가 있기에 나도 저 시대를 살았다면 독립투사가 될 수 있었겠다는 용기를 살짝 가져본다.

멈추지 않는 소녀의 ‘만세’, 유관순

충청남도 천안에서 태어난 유관순은 서울 이화학당을 다니던 중 3·1 운동에 참여했다. 일제는 학생들이 모이는 것을 막기 위해 휴교령을 내렸고, 이 때문에 유관순은 다시 고향으로 내려간다. 고향으로 내려온 유관순은 4월 1일 아우내 장날 수천 명의 사람들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를 전개했다.

헌병경찰들이 총칼로 무장하여 이를 진압했고, 유관순은 주동자로 몰려 체포됐다. 체포되니 후 모진 고문을 받았지만, 오히려 옥중에서도 만세운동을 주도했다. 그때마다 가혹한 고문과 학대가 이어졌고, 결국 혹독한 고문의 후유증으로 유관순은 18세의 나이로 감옥에서 순국했다.

18살, 고등학교 2학년 나이로 만세운동을 벌이다 모진 고문을 받고도 굴하지 않았던 유관순이 남긴 마지막 말이다.

“내 손톱이 빠져나가고 귀와 코가 잘리고 다리가 부러져도 그 고통은 이길 수 있으나 나라를 잃어버린 고통만은 견딜 수가 없다. 나라에 바칠 목숨이 오직 하나밖에 없는 것이 유일한 슬픔이다.”

나는 고2 때 뭐 했지? 유관순의 삶을 보면서 늘 갖게 되는 생각이다. 그러나 지금 그런 회한에만 젖어있기보다는 나는 지금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그래야 시간이 흘러서 나는 그때 뭐 했지? 라는 회한에 젖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배운다.

무엇에도 꺾이지 않는 강직함, 신채호

신채호는 독립운동가이자 사학인, 언론인이다. 외국인인 베델이 운영하기에 일본 통감부의 저촉을 받지 않던 대한매일신보에서 일제와 친일파를 비판하고 국민들을 계몽하는 글을 썼다. 이후 역사 연구가 곧 민족독립운동이라는 생각을 갖고 민족사적 영웅들의 전기와 위인전을 썼다. 그리고 민족주의 사학의 방향을 제시했던 <독사신론>, <조선상고사>, <조선사연구초> 등을 썼다. 이후 임시정부에서 이승만 대통령의 국제연맹청원사건을 비판하며 임시정부를 나와 무정부주의독립운동 중 체포되어 여순감옥에서 순국했다.

신채호는 강직한 성품으로도 유명했다. 그는 세수할 때 고개를 빳빳이 드는 습관이 있었는데 이를 이상하게 여긴 이광수가 물었다.

“선생님, 또 얼굴을 들고 세수하셨습니까? 고개를 숙이고 세수하면 씻기도 편한데 왜 그렇게 고개를 들고 세수하셔서 옷까지 버리시고 저를 힘들게 하십니까?”

이광수는 오늘도 세수하며 소매와 바지까지 옷을 적시고 들어온 신채호에게 이상하다는 듯이 물었다. 신채호는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세상이 모두 왜놈 세상이니 어디 머리를 숙일 곳이 있어야지!”

이렇게 강직한 성격을 가지고 있던 신채호는 독립운동을 한 죄로 영하 20도를 맴도는 혹독한 여순감옥에서 7년을 보냈다. 온기 없는 수감실과 혹독한 바깥 추위는 그의 건강을 해치기에 충분했다. 신채호의 병이 나날이 깊어지는 것을 걱정하던 가족들은 부호를 보증인으로 세워 출옥시키려 했으나 그는 이를 거절했다. 그 부호가 친일파로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죽음조차 꺾을 수 없는 신채호의 강직함을 엿볼 수 있다.

큰별쌤 최태성이 들려주는 대한민국 독립운동가 10인(1부)

항일 무장투쟁사에 한 획을 그은 김좌진

김좌진의 집안은 많은 재산과 노비를 소유한 부호였다고 한다. 서울에서 살아 대한제국의 사정을 잘 알고 있던 김범석을 만나게 되면서 계몽의식을 갖게 됐고, 항일 의병활동을 하던 김복한을 스승으로 두어 항일 구국운동에 대한 생각을 갖게 된다. 김좌진은 구국운동을 실천에 옮기기 위해 먼저 자신의 집에서 거느리던 노비 30여 명을 모두 모아 잔치를 벌인 뒤 노비문서를 태우고 자신이 소유하던 전답을 노비들에게 나눠줬다고 한다.

김좌진은 1910년 일제에 의해 국권이 피탈되자 항일 무장투쟁 전선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군자금 모집활동을 펼치다가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기도 했다. 1918년 일본의 감시를 피해 만주로 건너가서 1919년 북로군정서의 총사령관이 됐다.

1920년 10월 21일 백운평 계곡에서 김좌진의 북로군정서군은 계곡으로 들어선 일본군 선발대를 코앞까지 유인해 벼락같은 기습공격으로 200여 명을 사살했다. 뒤이어 도착한 일본군 본부대는 기관총을 쏴댔지만, 지형을 이용해 몸을 숨긴 채 공격하는 독립군을 도저히 당해낼 수가 없었고 결국 패퇴한다.

이러한 전투는 며칠간 계속됐고, 일본군 사상자 3000여 명이란 어마어마한 전과를 올리며 막을 내린다. 이것이 바로 청산리 전투다. 이 전투는 김좌진을 중심으로 한 지도부와 지역 주민들의 헌신적인 성원이 있었기에 성공한 것이었다. 서슬 퍼런 일제 강점기 전개된 항일 무장투쟁이 있기에 우리의 자랑스러운 저항의 역사는 더욱 풍성해지는 것이다.

오로지 민족 우선의 신념, 안창호

안창호. 학교 교정에 걸린 사진 중 아마도 탑이 안창호 사진이 아닐까 생각된다. 그만큼 교육에 있어서 독보적 역할을 했던 인물이기 때문이다.

안창호는 독립협회 활동을 하다가 교육학을 공부하기 위해 미국에 유학을 떠났다. 을사늑약 소식을 듣고 1906년에 귀국하여 신민회 조직에 참여했다. 신민회는 특히 교육에 신경을 썼다. 일본을 비롯한 열강의 침입에 맞서기 위해서 인재를 양성하고 민족교육을 해야 한다고 판단하여 평양에 대성학교, 정주에 오산학교를 세우는 등 교육활동을 적극적으로 펼쳤다. 그러나 일제가 신민회의 활동을 막기 위해 데라우치 총독 암살 사건을 조작하여 신민회를 해체시켰다. 안창호는 다시 미국으로 망명, 민족혁명 수양단체로 흥사단을 조직하여 활약했다. 이후 상해로 건너가 임시정부의 활동과 민족계몽을 통한 독립운동에 계속 헌신했다. 1932년 윤봉길의 의거가 있은 후 상해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됐다. 투옥이 반복되면서 많은 병을 얻었고 1938년 세상을 떠났다.

안창호는 ‘무실역행(務實力行)’을 특히 강조했다. 여기서 ‘무실’이란 거짓 없이 약속을 잘 지키자는 뜻도 있다. 윤봉길의 의거가 있은 후 일본 경찰은 임시정부 요원들을 잡기 위해 혈안이 됐다. 몸을 피해야 하는 상황. 그런데 안창호는 한 소년과 약속한 것이 있었다. 바로 소년단 행사 비용을 지원해주기로 한 약속이다. 고민 끝에 안창호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소년의 집에 찾아갔다. 그러나 이미 일본 경찰이 와 있었고 결국 그는 체포되어 3년간 옥고를 치른다.

옥고를 치르고 나올 때 자유의 몸이 되면 다시 독립운동을 하겠냐는 일본 경찰의 물음에 그는 이렇게 답했다.

“나는 밥을 먹어도 대한의 독립을 위해, 잠을 자도 대한의 독립을 위해서 해왔다. 이것은 내 목숨이 없어질 때까지 변함이 없을 것이다.”

의연한 기개와 당당함, 안중근

안중근은 을사늑약 체결 이후 대한제국의 상황이 안 좋아지자 독립운동전쟁을 위해 연해주로 망명했다. 이후 국내진공작전으로 일본군과 수비대를 공격했고, 의병 재기 시 단지동맹을 맺으며 구국을 위해 헌신할 것을 다짐했다. 만주 하얼빈에서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고 여순감옥에서 순국했다.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이후 재판을 받는 과정에서도 당당함을 잃지 않았다. 아마도 어머니 조마리아 여사의 편지가 그 힘이 됐을 것이다.

“네가 만약 늙은 어미보다 먼저 죽은 것을 불효라 생각한다면 이 어미는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너의 죽음은 너 한 사람 것이 아니라 조선인 전체의 공분을 짊어지고 있는 것이다. 네가 항소를 한다면 그것은 일제에 목숨을 구걸하는 것이다. 네가 나라를 위해 이에 이른즉 딴 맘 먹지 막고 죽으라. 옳은 일을 하고 받은 형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걸하지 말고 대의에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다.”

이 편지를 받은 안중근은 어머니의 뜻에 따라 상고하지 않고, 거사의 이유를 밝히는 <동양평화론>의 저술에 힘썼다.

사형이 집행되기 전 안중근은 최후의 유언에서도 대한민국의 독립을 염원했다.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었다가 우리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반장해다오. 나는 천국에 가서도 또한 마땅히 우리나라의 국권 회복을 위해 힘쓸 것이다. 대한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안중근의 꿈은 이루어졌다. 그러나 아직 그의 무덤은 찾지 못했다.

봉오동의 전설적 영웅 홍범도

홍범도는 1920년대 항일 무장투쟁의 본격적인 신호탄을 쏘아 올린 대한독립군의 봉오동 전투를 이끌었던 인물이다.

홍범도가 역사에 등장하게 된 것은 정미의병 때다. 그는 60전 60승의 신화를 써나갔다. 그래서 그의 별명은 ‘날으는 홍범도’였다. 도저히 그를 잡는 게 어려워지자 일본군은 부인을 잡아들여 귀순 공작을 벌였다. 그러나 그의 아내는 호통을 치며 이렇게 말했다. “망해가는 나라를 바로잡으려는 영웅호걸이 아낙네가 이같이 어리석은 글을 쓴다고 굴복하리라 믿는가!” 결국 계속된 고문으로 아내는 숨을 거두게 된다. 그리고 아들 역시 아버지와 함께 의병 전쟁 중 전사한다.

1920년 봉오동 봉오골. 이곳은 삿갓을 뒤집어 놓은 지형이었다. 일본군을 이곳으로 유인한 홍범도 부대는 사방에서 공격을 퍼부어 대승을 거뒀다. 임진왜란 때 이순신과 권율이 대승을 거둔 이후 일본 정규군과 싸운 첫 승리라고도 볼 수 있다.

1937년 소련의 중앙아시아 강제 이주로 카자흐스탄에서 움막 생활을 하게 된 홍범도. 그곳에서는 연극 ‘홍범도’가 공연됐다. 홍범도는 연극이 있을 때마다 극장의 맨 뒷좌석에 앉아 자신의 독립 투쟁기를 지켜봤다고 한다. 이를 바라보는 그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자신의 처지가 억울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이 노년의 독립투사는 “연해주에서 실려 올 때 동포 지도자들이 많이 죽은 것이 가슴 아파. 하지만 여기까지 와서 동포들이 꿋꿋하게 살고 있으니 다행이지. 난 동포들이 있는 곳이 좋아”라고 답했다고 한다. 홍범도는 끝까지 동포들 곁을 지키다 1943년 75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홍범도의 무덤은 아직도 그곳에 남아 있다.

소멸하지 않는 ‘국혼(國魂)’, 박은식

박은식은 ‘혼’을 강조하고 <한국통사>와 <독립운동지혈사>를 저술한 민족주의 역사가로 잘 알려져 있다. 유교의 개혁을 촉구하며 <유교구신론>을 저술한 유학자이기도 하다. 그리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2대 대통령이기도 했다.

박은식은 일제에 국권을 강탈당하자 “국체(國體)는 비록 망했어도 국혼(國魂)이 소멸하지 않으면 부활이 가능하다”며 독립운동과 역사서 집필을 목적으로 만주로 망명했다.

1915년 박은식은 <한국통사>를 완성했다. 이것은 단군 이래 모든 역사를 쭉 서술한 통사라는 의미가 아니라 아플 통자를 써서 식민지로 넘어가는 과정을 담은 대한민국의 아픈 역사라는 의미다. 박은식은 역사를 보존하는 것이 나라를 되찾기 위한 전제조건이고 원동력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에게 한국사 연구와 저술은 곧 독립운동이었다.

유대인들은 나라를 잃고 무려 1700년 동안 유랑과 노예 생활, 전쟁의 살육과 추방을 반복하게 된다. 그런데 그들은 기어이 고향으로 돌아온다. 그 원동력은 바로 자신의 역사를 잊지 않았기 때문이다. 박은식이 말한 것처럼 국체는 잃었어도 국혼은 잃지 않은 것이다. 우리에게 우리의 역사는 어떤 의미인가?

큰별쌤 최태성이 들려주는 대한민국 독립운동가 10인(2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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