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획 지난 100년을 돌아보며 새로운 100년을 그리다

자신의 모든 것을 버려 정녕 지켜야 할 것을 지키다

우당 이회영 일가가 유산으로 남긴 거룩한 인간상

우당 이회영 가문은 막대한 부귀영화를 포기하고 한평생 독립운동에 뛰어들어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표상으로 불린다. 이회영과 그 형제들의 삶을 다시 돌아보는 이유는 비단 고귀한 희생과 숭고한 헌신을 기리기 위해서만이 아니다. 그들 삶의 여정은 우리 사회가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나가야 하는지 묻게 만든다.

글. 한홍구(성공회대학교 교수) / 일러스트 제공. 대한결핵협회

진정한 보수는 어디에?

사람마다 생각이 다를 수 있지만, 나는 현대사를 공부하면서 현재 대한민국 사회에서 발생하는 혼란의 상당 부분이 이 땅에 진정한 보수가 사라진 데 있지 않나 하는 의문을 떨칠 수 없었다. 아니, 보수 야당이 아직도 저렇게 막강한데 이 땅에 보수가 없다니?

한국 사회는 아주 보수적인 사회였다. 조선 500년, 고려 500년, 신라는 1000년간 지속됐다는 사실만 봐도 200~300년마다 한 번씩 왕조 교체를 겪었던 중국에 비해 한국 사회에서 정치체제의, 그로 말미암은 사회 전반에 걸친 장기 지속성을 읽을 수 있다. 유교가 본질적으로 보수적인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새로운 시도의 조짐이 보이면 ‘전례없는 일’이라고 봉쇄해버렸던 조선의 유교 엘리트들이 보수적인 존재였음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고려에서 조선으로, 조선에서 일제강점기로, 일제의 지배를 벗어나 해방으로, 오랜 군사독재를 벗어난 민주화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한국 사회는 한 번도 지배 엘리트의 근본적인 교체를 경험하지 못했다.

그런데 지금 한국 사회에는 제대로 된 보수는 눈 씻고 찾아봐도 찾을 수 없다. 진보와 보수의 이념 대립이 격렬하다고 하지만, 한국 사회를 떠들썩하게 만든 여러 문제 중에서 진정 보수와 진보의 가치가 충돌했던 적이 얼마나 되는가. 자식을 차디찬 바다에서 잃어버린 부모들이 왜 세월호가 침몰했으며 국가는 또 왜 그토록 무기력하게 손 놓고 있었는지 그 진상을 규명하는 일이 진보와 보수의 이념에 따라 달라져야 할 일인가?

최순실 사건 이후 한국 사회에서 보수세력은 끝없이 추락하고 있다. 보수정치세력 내에서 일부 세력이 탄핵에 찬성할 때는 드디어 수구세력과 합리적인 보수가 분리되는 것이 아닌가 조금은 기대했으나, 그 헛된 희망은 산산이 깨져버렸다.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나는 법인데, 한반도에 엄청난 변화의 기운이 몰아치는 지금 꺾여버린 오른쪽 날개는 이렇게 굳어버리는 게 아닌가 심히 우려가 된다.

문재인 정부가 기대만큼 개혁성과를 보이지 못하면서 보수 야당의 지지율이 조금 반등했다지만, 이건 반사이익을 거둔 것일 뿐 자기가 잘해서 지지율을 끌어올린 것이 아니다. 100미터쯤 가라앉았다면 바닥을 친 것으로, 올라가 봐야 10~20미터 정도가 아니겠는가? 나머지는 자력으로 헤엄쳐 올라가야 하는데 그럴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다 버렸다. 진정 지켜야 할 것을 지키기 위해

한번 왕조가 서면 기본이 500년이던 이 땅에 진정한 보수가 없다는 기막힌 사실을 떠올릴 때마다 그리워하게 되는 분이 우당 이회영과 그 형제들이다. 이회영과 그 형제들은 자신들이 최고의 혜택을 누렸던 조선 사회가 무너져 내릴 때, 정녕 지켜야 할 것을 지키기 위해 모든 것을 버린 사람들이었다. 사회에서 지도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는 사람들 속에서 손톱만큼이라도 책임을 지는 사례를 볼 수 없게 된 오늘, 이회영과 그 형제들의 삶과 죽음은 우리의 가슴을 끓게 만드는 전설이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이회형 형제는 경주 이씨 백사 이항복(白沙 李恒福)의 10대손으로 조선시대 소론 세력의 대표적인 명문가였다. 대대로 과거에 급제하여 정승·판서가 줄을 이었고, 학문도 높고 장수하고 게다가 재산도 엄청났으니 누릴 것 다 누렸다. 당시 8만 석이 넘었다는 이회영 형제가 처분한 재산을 십수 년 전에 나온 논문에서 ‘600억이다’, ‘800억이다’라고 추산했는데, 부동산값 폭등을 반영하지 않는 너무 과소평가된 것이라는 느낌을 떨칠 수 없다. 6형제의 둘째 이석영이 양자로 가 물려받은 당대 최고의 부호이자 영의정이었던 이유원의 재산은 실로 어마어마했다. 황현의 <매천야록>에는 이유원이 자신의 별장이 있는 양주 가오실(楊州 嘉梧谷)에서 서울까지 80리 길을 남의 땅은 한 뼘도 밟지 않고 왔다고 기록되어 있으니, 그 부동산을 지금 시세로 환산한다면 수십, 수백 조가 되지 않을까?

나라가 망하자 6형제는 재산을 급히 처분하여 망명길에 올랐다. 6형제 중 망명을 주도한 것은 헤이그 밀사 사건의 숨은 주역인 넷째 이회영이었다. 6형제가 모진 고생 끝에 압록강을 건넌 뒤, 이회영은 일가식솔들에게 “이러한 고초로써 망국대부의 가족으로서 국가에 속죄하는 것이며 선열의 영혼에 사(謝)하는 것이요, 동시에 명일의 자주민이 되는 훈련”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국가에 대한 속죄는 진정 처절했고, 선열에 대한 사죄는 더할 나위 없이 뜨거웠으며, 자주민이 되는 훈련은 참으로 혹독했다.

나라를 찾겠다고 피눈물을 흘리며 망명길에 오른 6형제 중 해방 후 살아 돌아온 분은 초대 부통령을 지낸 다섯째 성재 이시영뿐이었다. 이회영은 1932년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모진 고문 끝에 목숨을 잃었다. 그 많은 재산을 독립운동에 쏟아부은 이석영은 나이 팔십에 문자 그대로 굶어 죽었다. 이석영과 막내 이호영은 지금 어디 묻혀 계신지 묘지조차 찾을 길 없다.

망명길에 오른 6형제의 첫 사업은 숱한 독립운동가를 길러낸 신흥무관학교의 건립이었다. 신흥무관학교를 세운 뒤 이회영은 국내로 잠입했다. 고종은 하나밖에 없는 누님의 외동딸을 이회영의 아들에게 시집보냈다. 이회영은 자신의 사돈이자 고종의 매부인 조정구와 함께 고종의 망명을 준비했다. 이회영의 주변이나 당시 독립운동 진영에서는 1919년 1월 고종이 갑자기 세상을 뜬 것은 이 망명계획이 일제에 누설됐기 때문이라고 확신했다.

고종이 세상을 뜬 뒤 이회영은 제국이 아닌 민국의 자유민이 되고자 했다. 그는 잠시 임시정부에 몸담았으나, 정부라는 거창한 기구에서 자리다툼을 하는 데 환멸을 느끼고 발을 뺐다. 대신 이회영은 20대의 젊은이들과 교류하면서 젊은 사상 아나키즘을 받아들여 개인들의 자유로운 연합을 통해 새로운 한국을 건설해야 한다는 꿈을 키웠다.

김좌진 장군의 재종 동생 김종진과 손잡은 이회영은 다시 만주로 가 독립운동기지를 재건하려 했으나, 독립운동 진영 내의 내분으로 1930년 1월에는 김좌진이, 1931년 여름에는 김종진이 각각 암살을 당해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회영은 독립운동기지를 재건하기 위해 자신이 직접 만주로 가기 위해 길을 나섰으나, 비밀이 누설되어 1932년 11월 다롄에서 일제에 체포됐다. 얼마 후 일제는 다롄수상경찰서에서 이회영이 쇠창살에 목을 매어 죽었다고 발표했으나, 실제로는 뤼순(旅順) 감옥에서 고문을 당해 목숨을 잃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기일은 1932년 11월 17일로 을사늑약이 맺어진 지 꼭 27년 만이다. 이름나는 자리 맡지 않고, 자신의 활동을 기록으로 남기지 않았지만, 아내이기 이전에 동지였던 이은숙의 <서간도시종기>와 이회영을 따른 이정규의 글, 아버지를 따라 독립운동에 나선 아들 이규창의 수기 등을 통해 우리는 어렴풋이 진정 지켜야 할 것을 지키기 위해 과거의 자신을 버리며 끊임없이 거듭난 참된 보수주의자를 만나게 된다.

왜 다시 이회영인가?

흔히 이회영 일가의 독립운동 투신을 서양식으로 해석하여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표상이라 이야기한다. 그렇게 해석할 수 있는 측면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냉정하게 평가하면 기득권을 더 잘 유지하기 위한 수단이다. 귀족 신분제가 무사적 전통을 이어받은 서구사회에서 전쟁이 일어났을 때 무인인 귀족들이 앞장서 싸우는 것이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대표적 사례라 할 수 있다.

비록 한 집안이지만, 집안 전체가 이렇게 다 바치고 다 비우고 끊임없이 떠나가다가 고문당해 죽고 굶어 죽은 사례를 찾아볼 수는 없다. 신흥무관학교에는 이회영 일가가 부리던 종의 자제들도 학생으로 입교했는데, 이 독립군들의 뒷바라지는 누가 했을까? 조선 최고의 명문가 대가댁 마나님들이 영하 30도 만주 칼바람 속에서 옛날 집에서 부리던 종들도 포함된 독립군들 밥 해주고 빨래 해주고 버선 기워주었던 것이다.

청산하지 못한 역사는 되풀이된다. 세월호의 선장이 속옷 바람으로 도망친 것이 어찌 우연이겠는가? 한국전쟁 당시 다리 끊고 도망쳤던 자들은 인천상륙작전 후 서울로 돌아와 피난 못 간 사람들을 빨갱이라고 쥐 잡듯이 잡았다. 해방 후 살아 돌아온 여성 중에 가장 오래, 가장 치열하게 싸운 정정화는 부역자로 잡혀가 과거 독립운동 시절 자신을 취조한 친일경찰에게 또다시 곤욕을 치러야 했다. 이 부역자 처벌의 총책임자가 백범 김구 암살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일제 헌병오장 김창룡이었고, 서울지역 책임자가 친일고등경찰의 대명사 노덕술이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며 친일세력은 반공애국투사로 거듭났다.

우리가 이회영과 그 6형제를 돌아보는 이유는 ‘역사 속에서 책임을 진다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우리 스스로에게 던지기 위해서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을 통해 우리는 한국 사회에서 보수의 역사를 다시 써야만 한다. 진정한 보수라면 마땅히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 대해 책임을 질 줄 알아야 한다. 많이 가진 자, 많이 누리는 자가 책임지지 않으면 사회가 어떻게 유지될 수 있겠는가? 현재의 수구세력들이 나라를 구했다고 내세우는 김창룡, 노덕술, 안두희, 서북청년단 같은 자들이 정녕 진정한 보수의 표상이 될 수 있을까?

분단 후 대한민국을 ‘재건’할 때, 좌파는 제헌헌법 제정에 참여하지 않았다. 중간파도 백범을 따라 남북협상을 위해 평양에 갔지 이에 참여하지 않았다. 대한민국 제헌헌법은 보수들만 모여서 만들었다. 그런데 그 제헌헌법의 내용이 급진적인 좌파들만 모여서 만들었다는 웬만한 강령보다 더 진보적이다.

지주들의 토지소유권을 부인하고 농지개혁을 하자는 주장을 조선팔도에서 땅을 제일 많이 가진 김성수, 한민당의 실질적인 지도자인 그 김성수가 받아들였다. 농지개혁보다 더 철저한 토지개혁이 독립운동가들의 오랜 약속이며 새 나라를 세우는 데 그런 조치가 없다면 나라가 공산당에게 넘어가고 말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었다. 김성수가 아무리 너그러운 인물이라 한들 알토란 같은 농지를 다 빼앗아간다는데 속이 얼마나 쓰렸을까. 그러나 그는 ‘정녕 지켜야 할 것을 지키기 위해’ 많은 것을 내놓았다. 이런 보수는 어디로 가고 김창룡, 노덕술, 안두희, 서북청년단 같은 것들만 날뛰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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