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칼럼

100주년을 맞는 3·1 혁명의 정신

글. 하성환(상암고 교사)

2019년은 3·1 혁명이 일어난 지 100주년 되는 해다. 3·1 혁명은 평화적 만세시위로 시작했으나, 일제의 탄압에 맞서 다수의 희생자가 발생하면서 점차 시민혁명의 불길로 치솟았다. 평화적 만세시위의 한계를 느낀 시민들은 총검으로 무장한 채 일제 관공서를 습격했다. 만세운동에 머물지 않고 무장투쟁으로 혁명의 불길이 타올랐다. 앞으로 교과서든 언론이든 3·1 혁명으로 쓰고 그렇게 불러야 옳다. 일제가 공문서에 썼던 ‘3·1 독립시위’나 해방 후 써왔던 ‘3·1 운동’은 이젠 폐기해야 할 용어다. 하루빨리 자주독립 국가의 언어답게 역사적 사건에 합당한 명칭으로 바꿔 쓸 일이다.

3·1 혁명은 7만 명에 이르는 피해자가 발생했음에도 꺾이지 않았다. 오히려 3·1 혁명의 좌절과 패배를 딛고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국체와 정체를 민주공화국으로 하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세웠다. 오늘날 대한민국 탄생의 밑거름이 3·1 혁명이다. 우리 민족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짓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건설과 독립운동을 반제 항일무장투쟁으로 승화, 발전시켰다.

의열단 창단과 봉오동전투 그리고 일본군 천여 명을 괴멸시킨 청산리전쟁은 항일무장투쟁의 빛나는 금자탑이다. 1920년대 전반기 일제와의 수백 차례 교전과 국내진공작전을 수행한 정의부, 참의부의 무장투쟁 또한 쉼 없이 지속됐다. 이러한 사실은 일제 관헌 자료를 통해서도 확인된다. 정의부, 참의부의 무장투쟁은 현행 교과서에 단 한 줄도 기술돼 있지 않지만, 분명코 3·1 혁명이 나은 위대한 성과다.

또한 3·1 혁명은 수많은 독립지사의 인생을 바꾼 전환점이 됐다. 무명의 항일혁명가 김산은 3·1 혁명을 목격하고 인생의 전환점을 맞는다. 김산에게 절대적 영향력을 끼쳤던, 금강산에서 온 붉은 승려 운암 김성숙 역시 3·1 혁명을 계기로 인생이 180도 바뀐다. 김성숙은 의열단 선전부장을 역임하며 승려에서 항일혁명가로 거듭났다. 3·1 혁명 당시 개성 송도고보 교사 신분으로 독립선언서를 밤새 인쇄해 서대문형무소에 갇혔던 이만규 선생 역시 마찬가지다. 의열단을 창단한 김원봉과 의형제를 맺은 김약수, 이여성은 3·1 혁명 발발 소식을 듣고 학업을 중단한 채 의열투쟁가와 노동운동가, 사회운동가로 급격히 변신한다.

3·1 혁명 100주년을 기념하는 올해 단재 신채호 선생의 표현대로 소아에 머물지 않고 보다 큰 공동체의 대의를 위해 분투해야겠다. ‘역사를 잊은 민족은 재생할 수 없다(출처: 조선상고사 중)’는 선생의 가르침을 다시 가슴에 새기며 3·1 혁명의 정신을 기억해야겠다. 일제에 항거한 3·1 혁명의 정신! 그것은 4·19 민주혁명과 5·18 광주민주화운동으로 그리고 1987년 6월 시민혁명으로 면면히 이어져 왔다. 그리하여 2017년 촛불로 되살아나 참된 자주의식, 민권의식으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촛불혁명에 담긴 민주시민의식이 대한민국의 주인인 시민들의 삶에서 성찰의 중심이 될 때, 올해 100주년을 맞은 3·1 혁명 정신은 올바로 계승되어 우리 미래를 더욱 밝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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